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데 조병옥이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미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4번째 대통령의 당선을 노리는
이승만의 대통령 경쟁자가 없어졌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연로한 이승만이 유고시 대통령을 대행할 부통령을
자유당 인물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궐기하였다.
4월 19일에는 서울 시내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규모의 시위를 계속하였고,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진주시켰으며,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피해가 잇따르자 4월 25일에 교수들까지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고, 자유당 독재 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이로써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화가 시작된 듯
하였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 7월 29일에 민의원과 참의원을 뽑는 총선거에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 사이에
격심한 분열과 집권 경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민주당이 분열되어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정국이 불안하였다.
정국의 불안은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는 한동안 중단되게 되었다.(사진:진성규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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