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

윤의사 2024. 4. 21. 10:44

주기철 목사는 아전 출신인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1897 11 25일 태어났다.

본명은 주기복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고 주기철로 개명하였다.

호는 소양(蘇羊)으로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이다.

웅천 개통학교와 평북 정주군의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겨야 한다

생각으로 191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1919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 연행되었던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로 나섰다.

한민족이 새롭게 거듭나야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경을 완수하기 위해 한번 죽을 각오를 하다 일사각오(一死覺悟)’를 강조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동참하였으나, 주기철 목사는 결사반대하였다.

이에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는 주기철 목사를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일경들은 말했다.

, 오늘 성도들 여러분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주겠소,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면 주목사는 이 못 위를 걷게 될 것이오.”

주목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 목사는 못 위로 스스로 걸어갔다.

주 목사가 신사참배의 반대의지를 거듭표명하자 일경은 황실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모진 고문과 회유를 하였다. 결국 주 목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복역 중 1944 4 21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1944 4 25일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고 1968년 국립묘지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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