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화성 제암리 학살 만행의 날’

윤의사 2024. 4. 15. 19:56

1919331일 향남면 발안 장터에 장날을 맞아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 연설회를 한 다음 만세시위를

하였다. 시위대는 일본인 소학교도 불질렀다.

다음 날인 41일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자 일본인 부녀자와 언론인이 피난할 정도였다.

만세시위가 계속 이어지자 일본군은 검거반을 조직해 탄압에 나섰다.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오늘날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본군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11명의 군인과 2명의 경찰은 4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강연을 한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를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이자 중위는 군사들에게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도록 명령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하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교회당에서 22, 밖에서 6, 도합 28명이 살해되었다.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H)와 미국 영사관 직원이 416일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살해된 시신과 집터는 그대로 방치되었고, 생존자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이 언덕에 모여있었다.

언더우드에 이어 4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에 보냈으며 일본 기독교 연맹을 비롯한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들조차 분노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등에서는 학살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일본군 중위 아리다 도시오의 행위가 온당하다고 주장하던 일본은 여론이 들끓자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나 무죄로 판결하며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1982929일 정부는 제암리 지역을 사적 제299<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으로 지정했다.

제암리3,1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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