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 19

오늘은 대한자강회 창립

대한제국 시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으로 고난의 시간이었다. 이때 나라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을 키워 점진적으로 외세를 막자는 것이요, 의병운동은 무력으로 외세를 막자는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것이 1906년 3월 31일 윤효정, 장지연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자강회는 교육, 산업 등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면서 월보와 간담회를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대한자강회는 고종강제퇴위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되었다. 대한자강회 설립취지서 일부 “무릇 나라의 독립은 자강 여하에 달렸다. 우리 대한이 종전에는 자강지술(自强之術)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우매한 것에 갇히고, 국력이 쇠패(..

보리숭어

숭어의 산란기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통 10월에서 2월까지다. 이 시기 숭어는 산란을 위해 먼바다로 나갔다가 산란을 끝내고 다시 바다의 얕은 곳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4월 경이다. 이때 잡히는 숭어를 ‘보리숭어’라 부른다. 4월은 보리싹이 나고 자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 잡히는 숭어는 대개 달다. 보통 숭어의 맛은 계절별로 다른데, 겨울과 보리 숭어는 달고, 여름은 싱거우면서 제맛이 나지 않으며 가을에는 고소하다. 눈 주위에 노란색이 많고 뭉뚝한 꼬리를 가진 가숭어(참숭어)와 달리 보리숭어는 검정색 눈과 뾰족한 꼬리가 특징이다. 정약전이 쓴 에서는 숭어를 “맛이 좋고 깊어 생선 중 첫째로 꼽는다”라고 평가했을 정도이고, 우리 선조들은 숭어를 일컬어 수어(秀漁)라고도 불렀다. 또한 부산지..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유림의 파리장서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김창숙은 33명의 민족 대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유림들을 규합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창숙 선생은 곽종석과 협의하여 1,422자에 이르는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의 유림이 서명하고 김창숙 선생이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3월29일 용산역에서 출발하였다. 김창숙 선생은 상하이에서 파리장서를 번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영사관 및 국내 향교에도 배포하였다. 이는 그 주도자들이 당시 유림계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전국적인 연합을 이루고, 이후 유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곽종석 등의 독립청원서는 원본과 발송본 두 가지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오늘은 안중근의사 순국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힐튼 호텔 뒤편을 지나면 백범광장이 나온다.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과 함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백여 계단을 오르면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나온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 성금으로 일본 식민지의 상징인 조선 신궁 터에 세워졌다. 협소한 전시 공간과 시설의 노후화로 40년 후인 201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면서 재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품(遺品)과 사진, 유묵 등이 전시돼 있다. 유묵을 보니, 자나 깨나 오직 나라만 생각한 듯하다. 그는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의 넉 자를 써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

오늘은 이승훈 성생님이 오신 날

기업가에서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을 발전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삼일운동 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본명은 인환, 호는 남강이다. 이승훈은 가난한 시골 선비 집안에서 1864년 3월 24일 태어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열 살 무렵부터 놋그릇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다. 20대에 이미 놋그릇 가게와 공장을 차릴 만큼 꽤 성공하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돈을 빌려 다시 가게와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1901년부터는 평양에 무역 회사를 세우는 한편 서울과 인천을 통해 외국과 거래를 하였다.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굽힌 이승훈은 이탈리아 사람과 연결하여 국제 무역 회사..

오늘은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 타계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한글 학자이자 교육가이다. 일제 시대에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경상남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오늘날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현배는 경주 최씨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 장군의 10대손이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으로 이주해 경성보통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해 자신의 스승인 한힌샘 주시경을 만나 조선어 강습원에서 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배웠다. 최현배는 조이곳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한글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에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서울 불바다

1994년 3월 19일 남북한 특사교환을 위한 제 8차 실무접촉회의가 통일원 송영대 차관과 북한의 박영수 단장 간에 판문점에서 열렸다. 양측은 최근의 남북관계와 핵사찰 문제 등 국제 정세를 둘러싸고 가시 돋친 설전을 주고 받았다. 북한의 박영수 단장은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라고 말하면서,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긴급 소집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병태 국방 장관은 "우리는 지금 상황을 통일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같은 해 1월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로 인한 핵공격에 대비해 대한민국에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아파치 헬기 등을 증강 배치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는 회담 4일 전에 "북한 핵 물질이 핵무기로 ..

오늘은 이승만 탄핵

1925년 3월 18일, 99년 전 오늘,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탄핵됐다. 이승만은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탄핵 사유는 대통령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국무원을 통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 정부의 위신을 손상했으며, 민심을 분산시키고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며 헌법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핵은 1925년 3월 11일에 이뤄졌고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42호 참조),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18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23일 면직시키고, 23일 곧바로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사실 이승만의 탄핵은 자금조..

흙비

오늘 황사가 예고되고 있다.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몽골 사막 등지에서 한반도로 날아오는 모래이다. 황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시대이다. 에 의하면 신라 8대 아달라왕 21년(174) 우토(雨土), 즉 하늘에서 비와 함께 흙가루가 떨어졌다는 기록이 황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신라 자비왕 21년(478년), 효소왕 8년(700년)에 노란비와 붉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무왕 7년(606년)에는 흙비(雨土)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백성들은 황사현상을 하느님으로부터 정치를 잘못한다는 경고와 징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황사현상을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 부덕의 소치로 생각해 반찬 가지 수를 줄이고, 술도 삼가는 등 몸가짐을 바로 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조..

오늘은 강원도 주문진에 북한 무장공비 침투

1969년 3월 16일, 밤 12시가 지날 무렵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현 강릉시 주문진읍) 소재 강남여인숙에 북한 무장공비 9명이 침투했다. 이들은 방첩 대원이라고 사칭하고 투숙자 9명의 주민등록증 4매, 승선증 1매, 공무원 신분증 1매, 숙박부 1권을 탈취하여 갔다. 오전 1시 20분 경에는 무장간첩 중 4명이 육군 대위, 중사, 병장 군복으로, 그리고 1명은 사복차림을 하고 강남여인숙으로부터 800m 정도 떨어진 전투경찰대 주문진 선박통제소에 침입하여 당시 근무 교대 중이던 206전투경찰대 소속 순경 2명과 사환 1명을 인질로 삼았으나 1시 40분경 결박당한 사환이 신고하면서 시한폭탄을 제거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 19일 1시 40분경 주문진 지서장은 무장간첩 출현 신고를 받고 경찰관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