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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비

윤의사 2024. 3. 17. 11:15

오늘 황사가 예고되고 있다.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몽골 사막 등지에서 한반도로 날아오는 모래이다.

황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8대 아달라왕 21(174) 우토(雨土),

즉 하늘에서 비와 함께 흙가루가 떨어졌다는 기록이 황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신라 자비왕 21(478), 효소왕 8(700)에 노란비와 붉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무왕 7(606)에는

흙비(雨土)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백성들은 황사현상을 하느님으로부터 정치를 잘못한다는 경고와 징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황사현상을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 부덕의 소치로 생각해 반찬 가지 수를 줄이고, 술도 삼가는 등 몸가짐을 바로

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조사하여 석방하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황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려 현종 때 흙안개가 4일 동안 지속되고,

공민왕 때 7일 동안 눈뜨고 다닐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황사를 흙비라 했다. 흙비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183번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인

흙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조 3(1394) 719일의 기록이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 태조 3(1394) 719일의 기록을 보자.

 

임금이 장차 무악의 터를 보고 도읍을 정하려 하는데, 문하부 낭사(郞舍)가 상서(上書)하였다.

 

"시기가 아직 덥고 흙비가 끼어 동가(動駕)하기 불편하며, 또 농민들은 여가가 없으니, 8월 보름이 지나기를 기다려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대로 따랐다.

 

흙비에 대한 기록으로 태종실록’ 11, 태종 6(1406) 29일의 기사에는 동북면(東北面) 단주(端州)에 토우(土雨)가 내리기를 무릇 14일 동안이나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오랫동안 흙비가 내려 고생을 한듯하다. 그리고 흙비를 먹비라고도 했다. ‘세종실록’ 3, 세종 1(1419) 313흙비가 내리어 젖은 곳은 새까맣게 되니, 사람들이 먹비라고 불렀다.”의 기사처럼 붓글씨를 쓰기 위해 벼루의 먹물을 만드는 먹의 검은 색을 생각하고 이름을 붙인 듯 하다.

흙비로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그중에는 군사들의 군장(軍裝)과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토벌군으로 갔던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는 흙비로 인하여 군사의 복장과 장비는 물론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세조실록’ 42, 세조 13(1467) 528일 기사에 보인다.

 

황사라는 말은 1954년 기상청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황사는 오래 전부터 발생했지만, 지구 온난화에 의해 건조해진 기후로 자주 발생하고 심해졌다.

더구나 중국이 산업 사회로 발전하면서 황사 속에 사람에게 해로운 중금속이 함께 날아와 민감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뚱딴지(돼지감자)를 심어 황사의 발생을 줄이려 하고 있다. 뚱딴지는 당뇨병과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12조가 아닐까 한다.(민병덕의 <잘난 척하기 딱좋은 우리역사문화사전>에서)

뚱딴지(돼지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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