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이승훈 성생님이 오신 날

윤의사 2024. 3. 24. 15:17

기업가에서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을 발전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삼일운동 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본명은 인환, 호는 남강이다.

 

이승훈은 가난한 시골 선비 집안에서 1864년 3월 24일 태어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열 살 무렵부터 놋그릇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다.

20대에 이미 놋그릇 가게와 공장을 차릴 만큼 꽤 성공하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돈을 빌려 다시 가게와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1901년부터는 평양에 무역 회사를 세우는 한편

서울과 인천을 통해 외국과 거래를 하였다.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굽힌 이승훈은 이탈리아 사람과 연결하여

국제 무역 회사를 차려 한국 최초로 국제 투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실의에 젖어있던 이승훈은 을사조약으로 나라마저 빼앗길 지경에 이르자 더욱 낙담하였다.

그러던 참에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교육 사업을 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장 상투를 자리고, 담배와 술을 끊고 나서 안창호, 이동녕 등이 만든 비밀 단체인 신민회에 들어갔다.

이승훈은 이미 운영하고 있던 서당을 신식 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으로 바꾸었다.

이어 1907년 12월 24일 오산학교를 세워 교장이 된 뒤 이종성, 이광수, 조만식 등과 함께 인재를 기르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1911년에 안악 사건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105인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4년 뒤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승훈은 감옥에 있는 동안 심한 고문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성서를 깊이 공부하고 수양을 쌓아

정신적으로는 더욱 강해졌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온 이승훈은 학교와 교회 일을 열심히 돌보았고,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삼일 운동 때는 기독교 쪽의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

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한다.”

라고 대답해 답변한 탓에 33인의 민족 대표들 가운데 가장 긴 3년형을 선고받고 세 번째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곧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세워 전국의 사학 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뜻을 펴 나갔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사장이 되어 친일 세력에 맞서는 민족 언론으로 키워 나갔으며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펴고, 민립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울에 있는 오산고의 교표 설명, 1955년 서울에 세워졌다.(사진 출처: 오산고등학교)
이승훈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