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 19

오늘은 행주성에서 대승을 거둔 날

임진왜란 중 조선군이 거둔 승리 가운데 3대첩을 든다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을 빼앗긴 왜군은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왜군까지도 모두 서울로 이동시켰다. 이때 함경도에서 내려오던 가토의 부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한 왜군이 벽제관에서 병력을 집결하고 명군과 전투를 벌여 패배하고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권율 장군은 오산 독산성(세마대)에서 왜군과 대치하다가 물러난 틈에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였다. 행주산성에 조선군이 있다는 소식에 벽제관 전투 승리 후 사기가 오른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의 지휘 아래 3만의 대군을 이끌고 1593년 3월 14일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

신냉전시대

오늘날은 신냉전시대이다. 중국의 시지핑과 러시아의 푸틴이 장기집권의 독재정치를 하면서 국민들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그리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와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이다. 냉전시대와 다른 점은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가 중국과 대립한다는 점이다. 사실 냉전시대는 77년 전인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은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화를 막겠다' 라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이 원칙에 따라 공산국가를 확대하려는 소련에 맞서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미..

오늘은 안창호 선생 순국

비밀 단체인 신민회를 비롯해 많은 항일 단체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 역량을 키웠다. 특히 자주 독립을 이루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민족을 계몽하고 독립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호는 도산이다. 안창호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청나라와 일본이 벌이는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이 이처럼 강대국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안창호는 서울로 올라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 학당에 들어가 서구 문물을 접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어 독립 협회에 들어가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고향에 점진학교를 세워 신식 교육을 실시..

여의주

용의 턱 아래에 있다고 하는 영묘한 구슬이다. 사람이 이것을 얻으면 변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졌을 때 ‘여의주를 얻은 듯이’라는 속담으로 표현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 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질을 불성(佛性)이라 했으며, 이 불성을 ‘여의주’로 표현하고 있다. 여의주와 관련된 절이 있다. 바로 용주사(龍珠寺)이다.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만들어진 갈양사인데,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절이 없어졌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은 것이다.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

태극기가 정식국기가 되었다.

우리 태극기는 고종 이재황이 직접 도안하여 1875년 조일수호조약 때,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는 역관 이응준에게 직접 태극기를 배 안에서 그려 사용하게 하였다. 이때 을 저술한 황준헌의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는 제안에 따라 4개의 발톱을 가진(4조룡, 왜냐하면 황제의 국가는 5조룡이고 제후의 국가는 4조룡이다.) 용을 그려놓으니,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 제독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데, 이는 청나라의 지방 정부에 해당되는 것이라며 반대하여 조선 대표였던 신헌과 김홍집에 의해 태극기가 급조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일본 수신사(박영효)가 잇따라 사용하면서 우리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기(御旗)로 사용하던 '태국팔괘도'를 변형해서 만든 것이 태극기..

오늘은 우도간첩사건이 발생

우도간첩침투사건 1973년 3월 4일, 제주도의 섬 중 소를 닮았다고 해서 불려진 우도에 북한 무장간첩 2명이 침투해 해초건조장 경비원의 생명을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 간첩은 도주해 생포하지 못했고, 현장에선 소련제 권총 1정과 탄피가 발견되었다. 우도와 같은 작은 섬까지 간첩이 침투하고, 오래 전부터 우도에 고정간첩 9명이 암약해 있다는 수사 결과 발표는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들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부산, 진해, 심지어 일본 오사카 조총련까지 드나들며 난수방송을 통해 북한 지령을 전달받았다. 이들 간첩의 총책은 4. 3 당시 무장대로 활동했다가 월북한 자라고 한다. 1년이 지난 후 1974년 5월 20일 제주도 북쪽의 추자도에 북한 간첩이 침투했다. 3인으로 이루어진 간첩들은 밤에 침투하다가 ..

홍유릉

3.1절이 지났다. 3.1절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가 고종의 독살설이다.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려다가 3월1일로 앞당긴 것이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있다. 고종 32년(1895)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 옥호루에서일본군에 의해 시신을 불태웠다.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면서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하..

3.1절

망우역사문화공간에는 일제에 대항해 사우다 순국하신 분들이 많이 잠들어계신다. 주로 산책 길 옆에 있어 사람들이 찾기가 어려움이 없었다. 그 중에 한분, 바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다. 선생이 3.1운동으로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의 일이다. 형이 정식으로 선고되기 전에 다른 민족대표들이 '이렇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라며 불안해했고 중국의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어지간해선 사형, 가벼워도 무기징역이란 설이 굳어지자 몇몇 민족대표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용운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는,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

오늘은 삼일절

오늘은 3.1절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고종의 독살설에 분노한 한민족이 궐기한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을 하루 앞둔 2월 29일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았다. 망우리 고개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망우(忘憂)’라는 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한을 서울로 정하고 나라의 기초를 닦은 후 친구인 무학대사에게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명당자리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에 무학대사는 검암산 기슭인 지금의 건원릉 자리를 묘자리로 잡았다. 묘자리를 보고 돌아오던 중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는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게노라‘라고 말했다. 이후 이 고개를 ‘망우(忘憂)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