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홍유릉

윤의사 2024. 3. 3. 10:50

3.1절이 지났다.

3.1절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가 고종의 독살설이다.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하려다가 3월1일로 앞당긴 것이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있다.

고종 32년(1895)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 옥호루에서일본군에 의해 시신을 불태웠다.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면서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0년에 홍릉의 풍수가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남양주 금곡 홍릉에 새로운 산릉공사를 시작 하였으나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공사가 또다시 중단되었다.

고종이 19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중단되었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여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제향공간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우고, 안에는 당가를 설치하였다.

침전 앞에는 문무석인과 기존의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기존의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香路)가 가운데에 깔려 있고, 판위는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놓여져 있다.

그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이 능역 안팎으로 배치되었고 능역 옆에는 재실이 있다.

(궁능유적본부 자료 참조)

홍릉 전경, 판위가 어로 오른쪽에 있는 것과 달리 왼쪽에 있다.
코끼리
기린
정자각 대신 一자형의 침전으로 바뀐 모습,  계단의 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릉침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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