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행주성에서 대승을 거둔 날

윤의사 2024. 3. 14. 20:09

임진왜란 중 조선군이 거둔 승리 가운데 3대첩을 든다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을 빼앗긴 왜군은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왜군까지도 모두 서울로 이동시켰다. 이때 함경도에서 내려오던 가토의 부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한 왜군이 벽제관에서 병력을 집결하고 명군과 전투를 벌여 패배하고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권율 장군은 오산 독산성(세마대)에서 왜군과 대치하다가 물러난 틈에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였다. 행주산성에 조선군이 있다는 소식에 벽제관 전투 승리 후 사기가 오른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의 지휘 아래 3만의 대군을 이끌고 1593년 3월 14일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약 3천명이었다.

수적 열세에도 조선군은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각종 화기를 이용해 격렬히 저항하여 왜군의 1군을 격멸했다. 이어서 공격하던 2군마저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왜군은 행주산성 근처에 누각을 짓고 총병과 궁병을 통해 성안을 공격해 행주산성 바깥 목책이 뚫리면서 조선군은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조선군은 왜군 총대장 우키다를 비격진천뢰를 포함한 각종 총통, 신기전 등으로 집중 공격해 우키타가 부상을 입게 되면서 후퇴하였다.

물러난 왜군은 화공전략으로 행주산성 주변의 목책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대비로 화공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서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활용해 공격을 하자, 이곳을 지키던 승병들이 잿주머니로 왜군을 공격하니 선두에 있던 왜군들이 시야를 볼 수 없어 혼란에 빠지니 조선군이 반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서쪽 성벽이 약하다는 것을 안 왜군이 계속해서 공격해 방어선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니 조선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적으로 불리한 조선군은 무기마저도 떨어지자 돌을 던져 공격하였다. 이때 부녀자들은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고 한다.

조선군이 수세에 몰릴 때쯤 당시 충청수사 정걸이 행주산성에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배 2척을 한강을 통해 올라오고, 때마침 수십 척의 조운선이 함께 하니 왜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던 때였기에 원군으로 생각해 후퇴하였다. 조선군은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패퇴시켰다.

석양 무렵 일본군의 시신은 행주산성 주변에 나뒹굴었으며, 권율 장군은 주위에 널려 있던 왜군의 시체들을 모아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왜군은 행주대첩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전투로 평가하면서 왜란에서 패배한 이유로 들고 있다고 한다.

행주대첩의 승리로 평양으로 후퇴한 명군이 남하해 조명연합군이 결성되어 벽제관에서 왜군을 물리치면서 여세를 몰아 4월에 한양을 되찾았으며, 왜군은 울산과 순천, 부산포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싸움은 권율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뒤,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명나라 원병으로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꾸었지만,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왜군이 다시 전투력이 상승할 때 행주대첩은 기세를 꺾고 삼남 지방으로 후퇴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전황을 완전히 조선으로 바꾼 전투라고 하겠다.(사진 : 고양시청)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 동상
행주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