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 16

독립운동가 손병희

오늘은 천도교(동학) 지도자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 종교와 교육 사업으로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다른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최대 규모의 한민족 독립 운동인 삼일 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민족혼을 일깨워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이루었다. 본명은 응구, 호는 의암이다. 손병희는 어렵게 자라 어려서부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1882년에 동학을 알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최시형의 바로 밑에서 고된 수행을 하였다. 손병희는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 신원 운동을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

신문의 날

오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일간지이며, 최초의 민간신문이고, 한글 전용신문인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과 독립협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1896년 오늘,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된 독립신문은 19세기말 조선시대 말기 시대상을 담아 일반 민중들에게 자유와 민권 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지만 조선말기의 혼란상을 수습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정부가 탄압을 하고, 수구세력의 미움을 받아 발행인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다가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었다. 1957년 언론계는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창간을 기념하고, 신문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주문진 아들바위

강릉시 북쪽의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언덕 끝자락의 주문진의 하얀 등대 너머 위치한 소돌아들바위공원에서는 바람과 파도에 깎인 절묘하고 기괴한 모습의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도로 쪽에서 보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 하며, 코끼리 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아들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쥐라기시대에 바닷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들바위 홈페이지 참고)

간디의 소금행진

영국은 1882년부터 식민지 인도에 불공정하고도 엄격한 과세 정책을 시행하였다. 인도에서 채취한 소금을 영국으로 가져다 가공한 후 다시 인도에 엄청난 세금을 매겨 되팔았다. 소금령으로 인도인은 소금을 직접 만들 수 없었고, 천일염에 손을 대면 체포되었다. 할 수 없이 인도인들은 영국에서 가공한 비싼 소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소금 독점에 반대해 1930년 3월 12일 간디가 소금 행진을 시작했을 때 79명이 뒤따랐지만 387㎞를 걷고 난 4월 30일까지 300만 명이 함께 했다. 소금 행진은 간디의 ‘사트야그라하’ 중 하나였다. 산스크리트어 ‘사트야(진실)’와 ‘아그라하(저항하다)’의 조어인 사트야그라하는 인도 독립과 자치를 주장하던 간디가 1920년부터 불복종 운동 등을 통해 영국에 요구했던 것..

드라마 보다가 도둑맞고 밥 타고

《여로》(旅路)는 1972년 4월 3일부터 1972년 12월 29일까지 211회 방송되었던 KBS 1TV 일일 드라마로 70%라는 높은 시청률이 나온 이 드라마의 처음 제목은 ‘女路’로 ‘여자의 길’을 그렸는데, 방송이 연장되면서 ‘旅路’로 바뀌었다. 주인공 분이(태현실)는 가난 때문에 술집 작부로 일하다가 부잣집의 아들이나 머리가 딸리는 영구(장욱제)의 부인으로 씨받이 겸해서 팔려오게 된다. 신랑이 정신지체장애임에도, 분이는 남편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분이의 진심을 안 영구도 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분이는 시집온 그날부터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권미혜) 사이에서 구박을 받았다. 아들 기웅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과거 술집 작부로 일한 사실로 쫓겨났다. 1952년 6.25..

제주 4.3사건의 주범, 김달삼

제주 4.3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인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대구가 고향이다. 1943년 일본 오사카에 있는 성봉중학교를 졸업 후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에 임관됐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1945년 일본에서 결혼했다.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원래 공산주의자였던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으로 이승진이 이를 이어 받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해방 직후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6년 대구10.1폭동에 가담하여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신임을 받은 후 1948년 4·3 사건 당시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