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제주 4.3사건의 주범, 김달삼

윤의사 2024. 4. 3. 14:44

제주 4.3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인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대구가 고향이다.

1943년 일본 오사카에 있는 성봉중학교를 졸업 후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에 임관됐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1945년 일본에서 결혼했다.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원래 공산주의자였던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으로 이승진이 이를 이어 받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해방 직후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6년 대구10.1폭동에 가담하여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신임을 받은 후 1948년 4·3 사건 당시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김달삼은 친일파척결, 외지경찰철수, 남북 자주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제주도에서 독단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남로당 전남지부의 지시를 받았다는 설도 있음)
같은 해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김달삼은 여기에 참가해

'제주 4.3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북한정권수립을 위한 예비 모임이라 할 해주인민대표자대회는 남한에서 1002명이, 제주도에서는 6명이 참여했다.

김달삼은 이 회의에서 김일성, 허헌 등과 함께 49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3월 김달삼은 300명의 인민유격대를 이끌고 안동과 영덕으로 침투해 게릴라 활동을 벌여 빨치산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군경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사살되었다고도 하나,

6.25 전쟁 중에 다시 동해안으로 침투해 부산으로 향하다가 사살되었다고도 한다.

김달삼은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았는데, 그의 제주 4.3폭동에 대한 훈장으로 추정된다.

제주 4.3사건에 대해 북한에서 발행한 < 조선대백과사전> 제20권은 348~349쪽에서

'제주도 인민봉기로서 미제 침략자들이 조작한 5·10 망국 단독선거를 반대해 주체 37(1948)년 4월3일 제주도 인민들이 일으킨 반미(反美) 구국항쟁'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사건으로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보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당시 공산주의자들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피해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