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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출범

10월 10일, 신군은 일시에 총독부를 습격하였다.(10월 10일은 오늘날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의 국경일로 정해져 있다) 동맹회 혁명 세력과 일반 민중들이 곧바로 여기에 가세하였다. 사태를 직감한 무창성(武昌城)의 총독은 상해로 도망을 쳐버렸고, 혁명군은 순식간에 무창성을 점령하였다. “우리들은 대개 하사관급의 낮은 병사들요. 우리를 지도해야 할 손문 선생과는 연락이 닿지 않으므로 어서 지도자를 뽑아서 조직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 중에서 최고 높은 어른은 여원홍 여단장님일 것이요. 이 분을 우리의 지도자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리고 무창에 남아있던 여단장 여원홍(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면서 선언하였다.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에 의한..

쇼생크 탈출을 시도했던 폐세자 이지

광해군의 장남 이지(李祬)는 선조 31년(1598)에 태어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박씨는 광해군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다 인조반정 때 처형된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1623년 3월 14일 인조 반정이 일어나 이지는 폐세자로 강등되었고, 같은 해 3월 23일 아버지 광해군 및 가족들과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빠른 물살이 이는 강화해협을 건너는 이지의 마음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이다. 이지는 배 안에서 시를 썼다. 塵寰飜覆似狂瀾(진환번복사광란) 何必憂愁心自閒(하필우수심자한) 二十六年眞一夢(이십육년진일몽) 好須歸去白雲間(호수귀거백운간) 속세의 흥망성쇠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

꿩 대신 닭

오늘은 설날이다. 설날에 먹는 것이 떡국이다. 떡국에는 소고기를 끓인 사골국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궝고기가 떡국 국물 재료로 으뜸이었다. 고려후기 몽골의 영향을 받아 상류층이나 귀족들의 취미로 즐겨하던 놀이가 매사냥이다. 매가 잡아온 꿩으로 국물을 만들어 떡국이나 만둣국을 만들었다. 또한 요즘 만두 속 재료로 사용하는 돼지고기도 꿩고기를 사용했다. 꿩고기로 만든 떡국이나 만둣국은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에게 꿩고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꿩 대신에 닭고기로 떡국의 국물을 내기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설날에 먹는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 한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더 먹기에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는 뜻으로 '첨세병'이라 했다. ..

설날을 구정(舊正)이라 한 적도 있다

내일이면 설날이다.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 되어 삼일 연휴로 쉬게된 것은 30여 년정도이다. 이전에는 일본의 잔재인 신정을 설날이라고 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여 뿌리를 없애려고 하였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이란 책을 펴내고 나서 우리말ㆍ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학교에서 우리말이나 글을 쓰다가 적발되면 선생님들에게 혼쭐이 났다. 심지어 창씨개명이라고 해서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뿌리를 없애기 위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전통문화를 즐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설날을 양력 1월 1일로 하여 신정(新正)이라 하면서 지내고, 지금까지 지내오던 설날인 음력 1월 1일을 구정이라 하여 낡은 풍속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오늘은 트리뷴지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더글라스 스토리는 런던 트리뷴(The Tribune)지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서 을사늑약에 관한 고종의 밀서를 받아 1906년 2월 8일자에 트리뷴지에 폭로 보도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05년경 스토리는 중국 북경에 머물러있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대한제국 외교관이 어렵게 외교를 펼치는 것을 보고 한반도에 관심을 가졌다. 원래 스토리는 전쟁과 국제전문기자로 영국에서 꽤 알려진 기자였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부근에서 태어난 스토리는 30세 전후에 영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이 벌인 보어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기 시작해, 러일전쟁 때에는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러일전쟁 후 한국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와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906년 1월 초에 한국에 들어와서 상해에서..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광무 9년(1905) 인제의 백담사에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한용운은 출가 전에 혼인을 하여 아들 한보국이 있었다. 한보국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월북하였다. 1931년 한용운은 서여연화(徐如蓮花)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었다. 남편이 선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과 서여연화의 만남은 남편을 위한 법회날이었다. 돈이 많았기에 전국 각지의 범패까지 동원한 대규모 법회에서 서여연화는 다른 스님과 달리 차갑게 자신을 대하는 한용운에게 마음이 동했다. 한용운도 하얀 소복을 입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인 서여연화에 관심이 있었다. 이때 한용운은 첫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기에 마음껏 한 여인을 좋아할 수 있었다. ..

광해군의 유배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배지가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이 한양도성 가까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청나라에서 언제 자신을 임금에서 내릴 수 있다는 의심병으로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훗날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심지어 손자까지 사사(賜死)시키는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것에서 증명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더욱 불안감이 높아져 1637년 광해군을 제주도로 이배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면서 쓴 시가 전하고 있다. 제주에서 광해군(光海君)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

오늘은 입춘

오늘은 24절기가 시작되는 봄이 온다는 입춘(立春)이다. 입춘은 24절기 중 첫번째 절기로서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봄을 맞는 날이므로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원하는 입춘축(立春祝)을 집 대문이나 대들보ㆍ천장 따위에 붙인다. 입춘축을 춘축(春祝),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 춘련(春聯), 문대(門對), 춘첩자(春帖子), 춘방(春榜), 대련(對聯), 춘첩(春帖)이라고도 한다. 입춘날 입춘시(2024년 2월 4일 17시 27분)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며, 전라도에서는 입춘축을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여 입춘에는 꼭 하는 세시풍속이다. 입춘첩을 붙이는것은 가정에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이며 이러한 전통은 고대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을 비..

연산군 유배지 강화도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한양도성에서 가까우면서도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바다가 좁아 조류가 급하기에 접근이 어려운 섬이었다. 2014년 길이 2.11 km의 교동대교가 안공되면서 연륙도가 되어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는 섬이 되었다. 단 민간인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 주민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교부받고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에 그 출입증을 보여주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고 야간(오후 8시~오전 6시)에는 통행할 수 없다. 지금은 편리한 곳인 교동도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연산군을 비롯한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조류가 급한 강화해협의 지리적 조건으로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렵고(오죽하면 물을 두려워한 몽골이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천도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로 피난갔..

오늘은 교육입국조서 발표

1896년 최초의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세워지며 영어, 산수, 지리 등 근대적인 학문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갑오개혁으로 발표한 홍범 14조에서 ‘새로운 학문의 학습을 위한 외국 유학’을 11조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을미개혁 이후 1895년 2월 2일에 고종이 조칙(詔勅)으로 발표한 교육에 관한 특별조서인 교육조서를 발표하였다. '국가의 부강은 지식의 개명에 달려 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는 내용으로, 이때 교육의 3대 강령으로 덕육(德育)‧지육(智育)‧체육(體育)을 제시하였다. 교육의 3대 강령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사가 필요했기에 1895년 4월에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해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계속해서 <소학교령>과 <외국어학교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