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쇼생크 탈출을 시도했던 폐세자 이지

윤의사 2024. 2. 11. 20:09

광해군의 장남 이지(李祬)는 선조 31(1598)에 태어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세자빈 박씨는 광해군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다 인조반정 때 처형된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1623314일 인조 반정이 일어나 이지는 폐세자로 강등되었고, 같은 해 323일 아버지 광해군 및 가족들과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빠른 물살이 이는 강화해협을 건너는 이지의 마음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이다. 이지는 배 안에서 시를 썼다.

 

塵寰飜覆似狂瀾(진환번복사광란)

何必憂愁心自閒(하필우수심자한)

二十六年眞一夢(이십육년진일몽)

好須歸去白雲間(호수귀거백운간)

 

속세의 흥망성쇠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라.

나는 기꺼이 가리라, 흰 구름 사이로

 

폐세자 이지는 강화해협의 거친 물결을 바라보면서 진환번복(塵寰飜覆)’이라 표현해 티끌처럼 흥망성쇠가 뒤범벅되는 세상의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이다.

이지는 26년의 인생을 꿈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던 순간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유배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지는 이 길이 자신의 마지막 길임을 알고 흰구름 사이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위리안치된 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폐세자빈인 박씨와 함께 수의를 만들어놓고 보름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며 비폭력 저항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목을 매달았지만 여종에 의해 발견되어 실패하였다.

이즈음 서울에서 인두와 가위를 보내오니 탈출을 계획하였다. 이지와 폐세자빈은 인두와 가위를 이용하여 땅굴을 파서 탈출할 생각을 하였다. 매일 폐세자는 굴을 파고, 폐세자빈은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날랐다. 이렇게 굴을 파들어간 지 26일만에 70(21m)를 파서 드디어 집 바깥으로 통하는데 성공했다.

521일 밤 이지는 약조했던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바꾸며 멈칫거리다가 지키던 군사에게 체포되었다. 뒤이어 굴을 나와 나무 위에서 남편을 바라보던 폐세자빈은 남편이 체포되자 낙심하여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났다.

그럼 체포된 폐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폐세자의 처단을 두고 조정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영의정 이원익과 인열왕후(인조의 왕비)가 폐세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인조는 반정세력의 강요에 못이겨 탈출 미수사건이 난지 한 달여 만에 폐세자에게 자진할 것을 명했다.

폐세자는 자진을 앞두고 몸을 씻고 의관을 정리헸다. 금부도사의 불허로 손톱과 발톱도 깍지 못하자 폐세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는 깎아달라고 말하고는 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두 차례에 걸쳐 4번씩, 서쪽을 향해서도 두 차례에 걸쳐 4번씩 절을 하고는 허리끈으로 목을 맸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끈이 끊어져 실패하고, 이번에는 숙주(熟紬·삶아서 익힌 실로 짠 명주)로 목을 매어 마침내 숨을 거드었다.

자식 부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폐비 유씨는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병으로 누웠다가 4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폐비 유씨는 다음 생에는 제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하니 가슴이 찡하다.

 

2020년에 남양주시청에서는 폐세자 이지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묘표가 없어 정확한 묘의 주인은 알 수 없어 발굴을 해 묘지명을 봐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보고 배우는 인물사 > 인물여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  (0) 2023.09.03
'사슴'의 작가, 노천명  (2) 2023.09.02
오늘은 나도향 타계  (2) 2023.08.26
청백리 박이창  (0) 2023.08.11
양평의 노비 시인, 정초부  (0) 202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