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청백리 박이창

윤의사 2023. 8. 11. 10:21

청백리로 유명한 박이창의 본관은 상주이며, 할아버지는 판사재시사를 지낸 박문로이다.

태조 3년(1394)에 대제학을 지낸 아버지 박안신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숙주는 처조카이다.

태종14년(141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종 17년(1417)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면서 세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전라도에 감찰로 나가 조희정·양맹지 등이 나라의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세종 11년(1429) 함길도 경차관으로 함길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 소홀한 수령관들을 조사하여 관직을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종 16년(1434) 내자소윤이 되어 경기·황해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관리들의 실태를 살폈다. 

세종 25년(1443)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 1445년에는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세종이 다섯 살에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난 김시습(金時習)을 승정원으로 불러서 시험을 하였는데,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시를 짓도록 한 일화가 있다.

1448년 문종이 즉위하자 형조참판이 되어 평안도를 좌우로 나누어 각기 도절제사를 보내고, 강계와 삭주에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물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갈 때 큰 장마를 만나 중도에 체류하게 되면 양곡이 다 떨어져 반드시 굶어죽을 것이라는 종사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40말의 양곡을 더 가져간 것이 지금까지 청백리로 살아온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1451년 9월 16일 의주 신안관에서 밤중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결하면서 일행을 처벌하지 말 것을 유서로 남겼다. 박이창 자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양곡을 많이 챙겨 이것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많자 이런 폐단을 고친 사람이었기에 죄의식이 많았던 듯 하다. 

문종은 박이창의 자결 소식을 평안도관찰사로부터 보고 받은 후 승정원에 이르기를

“박이창이 법을 범한 것을 마음에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기에 이르렀으니, 내 마음이 측은(惻隱)하기 그지없다. 만 리 길에 몹시 고생한 사람이므로, 나는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오려고 하지 않았다가 관리들의 뜻으로 억지로 잡아오게 한 것을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하였다. 또 슬퍼함을 표하면서 부의로 주는 물건인  부물(賻物)을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그 일행이 범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사람들은 박이창이 국법의 준엄함을 보여주었다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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