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어머니의 자식 사랑

윤의사 2022. 12. 4. 15:24

양희수가 전라도 영광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가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배가 고팠으나 주위에는 주막이나 민가도 없었다.

민가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다 허름한 집을 찾았다.

양희수가 인기척을 하니 소녀가 나왔다.

"내가 시장해서 그런데 밥 한끼 먹을 수 있겠소?"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기꺼이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 내왔다.

소녀의 정성에 감동한 양희수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이것은 고마움으로 내가 그대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네."

하면서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을 주었다.

`채단'이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이다. 

양희수의 말에 소녀는 급히 안방으로 가서 보자기를 가져와 

"청선과 홍선을 이 보자기에 주시지요."

라면서 펼쳤다.

"아니 웬 보자기를..."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대답에 양희수는 두 부채를 보자기에 내려놓았고, 소녀는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놓았다.

시간이 흐른 후 군수로 부임한 양희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양희수를 만난 사람은

"이곳에 부임하시며 전주 부근에서 식사를 하시고 부채 두 개를 주신 일이 있는지요?"

라고 물으니 양희수가 그렇다고 답했다.

"지금 제 딸이 나이가 차서 혼례를 올리고자 하나 채단을 이미 받아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해서 사실을 알고자 찾았습니다."

이에 양희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이미 혼인을 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다. 양희수의 말에 실망하며 관아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길을 막았다.

"저는 군수 나리의 부인입니다. 지금 몸이 아파 군수 나리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니 비록 정부인이 아니라도 군수 나리와 함께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이에 동의하여 전주 소녀는 소실이 되었다.

양희수에겐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전주 여인과의 사이에선 양사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전주 여인은 정실 부인이 죽자 사준과 사언에게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그러나 사언은 자신이 소실의 아들인 서자라는 사실에 실망하여 술로 시간을 보냈다.

사준과 어머니의 설득에도 소용이 없었다.

양희수가 죽자 사언은 부친상에 상주로 문상을 맞을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하였다.

전주 여인은 상주인 사준에게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총명하고 풍채도 있으나 첩이 낳았다 하여 서자라는 딱지를 벗겨주지 않는다. 서모인 내가 죽으면 사언이도 함께 상주 노릇을 할 수가 있고, 이후 서자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고 부탁하고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였다.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자한 어머니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사준은 작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여자가 수절을 위해 남편 뒤를 따라 죽으면 열녀로 평가해 정려문을 세워주며

어머니가 열녀가 되면 아들들도 서자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한 듯 하다.

명종 1년(1546)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과 평안남도 강동 지역인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내는 등 40년간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전혀 부정이 없었으며 자손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형 양사준과 동생 양사기와 함께 글이 뛰어나 중국의 삼소(소식·소순·소철)와 비교되곤 했다.

어머니의 희생이 자식을 감동시켜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의 4대 서예가가 되었다고 하겠다.

양서언의 시인 태산가이다. 서자인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에 감동해 입신양명한 후 지은 시로 전해진다.

 

대산수고이역산(泰山雖高是亦山)

등등불이유하난(登登不已有何難)

세인부긍노신력(世人不肯勞身力)

지도산고불가반(只道山高不可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영평천 옆의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인 금수정으로 예부터 영평 8경의 하나이다.

조선 중기에 김명리가 세웠으며 풍수지리상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정(牛頭亭)이라고 했다가,

양사언이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안동 김 씨의 외손인 양사언이 안동 김씨의 '金'과

정자가 있는 창수면의 '水'자를 따서 '금수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기단과 주춧돌만이 남아있던 것을 포천시가 1989년 복원하였다.

현 정자의 현판은 암벽에 새긴 양사언의 '金水亭'이란 글씨를 탁본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금수정 아래 세워진 태산가 시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