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양평의 노비 시인, 정초부

윤의사 2023. 6. 18. 11:47

동호(東湖)

 

東湖春水碧於藍

白鳥分明見兩三

柔櫓一聲飛去盡

夕陽山色滿空潭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을 채우나니
 
 
이 시는 정초부(鄭樵夫)라는 노비 시인이 지은 시이다.
초부는 나무꾼이라는 뜻이기에, ‘정씨 나무꾼’으로 조선시대 최하층 신분이라 하겠다.
그는 조선 정조 때 사람으로 지금의 양평 지역에서 여씨 집안의 노비였다.
한시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 등 10개가 넘는 규칙과 문학성까지 갖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해야만 한다.
여춘영 부친은 어깨 너머로 들은 한시를 한번 듣고 암송하는 정초부의 천재성에 감탄해 글을 가르쳤으며,
여춘영은 그와 함께 공부하면서 20살이나 연상인 그를 스승이자 벗으로 생각했다.
정초부의 학업 속도는 매우 빨라서 시 잘 짓는 나무꾼으로 경기 일대에 알려졌다.
주인집 아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도록 과시(科詩)를 도와줘  43세 무렵에 면천되었다.
양인이 되었으나 먹고사는 것이 먼저이기에 나무를 해서 장작을 만들어 동대문 시장까지 와서 팔았다.
그러나 여전히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 양근(오늘날 양평) 관아에 쌀을 빌리기 위해 갔다가 호적대장에 그의 이름이 없어 거절당한 후 서글픈 마음을 표현한 시가 쓴 시가 바로 ‘산새는 얼굴을 알건만’이다.
 

산새는 얼굴을 알건만

山禽舊識山人面

郡藉今無野老名

一粒難分太倉粟

江樓獨倚暮烟生.

산새는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얻기 어려워/

강가 누각에 홀로 기대어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원망과 울분보다는 오히려 속으로 참으며 삭이면서 견디는 모습을 정감이 넘치는 시로 표현했다.
이 시에 감탄한 양근군수가 다른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했다.
정초부는 제목을 받자마자 시를 지었고, 군수는 정초부의 능력에 감탄해 쌀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정초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선비들과 함께 하는 시회에 참석하였다.
<다산시령>은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18세기 최고의 문인들의 시만 골라 묶은 시선집이다.
이 책 안에는 <초부유고(樵夫遺稿)>라는 제목으로 노비 시인 정초부의 시 약 90()가 실려 있다.
정초부의 본명은 이재(彛載)이며, 주인인 여씨(呂氏)가 노비 문권(文券)을 불사른 이후 갈대울에 거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산시령(사진: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처음에 소개한 '동호춘수벽어람(東湖春水碧於藍)'은 첫 글자만 차용해 김홍도가 오늘날 서울 옥수동 부근 한강을 그린 작품 ‘도강도’(渡江圖)'에 남긴 화제(畵題)이다. 원작자의 이름이 없어 김홍도의 시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김홍도의 도강도(사진: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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