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

윤의사 2023. 9. 3. 15:50

1885930일 박서양은 박성춘(백정이기에 이름이 없다가, 백정의 신분 해방을 맞아 봄이 왔다는 뜻의 성춘으로 지음)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가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일 때 아들인 박봉출이 다니던 교회 목사인 무어의 소개로 왕의 의사인 캐나다 선교사이자 서양 의사인 에비슨에게 치료받아 완쾌하였다.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도 못받던 시절에 박가는 큰 감동을 받으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백정들처럼 갓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무어 교회를 백정교회라 불렸다.

에비슨이 1895년 유행한 전염병의 방역 책임자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고종은 내부대신 유길준을 통해 사의를 나타냈다. 에비슨은 유길준에게 백정도 상투에 갓을 쓸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올리자 이에 찬성하였다. 얼마 후 박가가 상투에 갓을 쓰고 교회에 나타났다.

백정이었던 박가는 후에 금융업으로 부자가 되었고, 191112월 장로가 되었다. 박가는 18984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서 외세침입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며 계몽운동에 나섰다.

박가는 백정의 딸과 혼인해 박봉출(박서양)을 얻었는데 총명하고 성실하였다. 관습에 따라 박봉출도 백정의 길을 가야 했지만, 박가는 아들의 결혼식에 에비슨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제 아들이 결혼도 했으니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에비슨은 박봉출의 인간성을 파악하려고 병원 청소와 침대 정리 등 험한 일을 시켰는데, 불평 없이 하는 것을 보고 일자무식인 박봉출에게 글을 가르쳤다.

왕가나 양반들이 반대해도 이를 물리치며 박봉출을 제자로 지도하였다. 1900830일 제중원의학교(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회로 입학하였다.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자 낮에는 에비슨의 조수로 일하고 밤에는 의학을 공부했는데, 제중원의 의사 조수로 활동하면서 의사의 수술을 보조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71023일의 기사에 "난산(難産)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씨와 의학생 박서양씨가 소생시켰다"고 보도하고 있다. 190863일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해 64일 의사 면허를 받아 서양의사가 되었다(이때 박서양으로 개명함).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한 최초의 의사인데, 박서양은 당시 국내에서 배출된 최초의 서양 의사이며, 신분을 뛰어넘은 의사가 된 것이다.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과목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재직했다. 백정 출신인 박서양을 학생들이 업신여기자 내 속에 있는 오백 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라며 설득했다.

1917년 중국 간도 지방에 가서 구세의원을 개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 독립군들을 치료하였다. 숭신소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섰다. 1935년 학교가 폐교당하자 귀국하여 고향인 황해도 연안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록문화재, 광화문에서 보다' 특별전, 2021.4.16.- 7.18)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