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제주도

광해군의 유배

윤의사 2024. 2. 5. 20:27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배지가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이 한양도성 가까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청나라에서 언제 자신을 임금에서 내릴 수 있다는 의심병으로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훗날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심지어 손자까지 사사(賜死)시키는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것에서 증명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더욱 불안감이 높아져 1637년 광해군을 제주도로 이배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면서 쓴 시가 전하고 있다.

 

제주에서

 

광해군(光海君)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濟州(제주)

 

炎風吹雨過城頭(염풍취우과성두) 瘴氣薰蒸百尺樓(장기훈증백척루)

滄海怒濤來薄暮(창해노도래박모) 碧山愁色送淸秋(벽산수색송청추)

歸心每結王孫艸(귀심매결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興亡消息斷(고국흥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광해군의 유배 생활은 강화도나 제주에서나 초연한 자세로 살아갔다. 제주도로 이배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위리안치였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종들까지 광해군을 영감’[爺爺]이라 부르며 멸시해도,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아냈다고 한다.

반정공신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이 광해군을 돌보는 책임을 졌는데,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광해군을 잘 돌보았다고 한다. 광해군이 후에 자신을 잘 돌봐준 목사가 이시방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광해군은 귀양생활 18년만인 1641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었다. 유배 18, 제주에 온 지는 4년 만이다.

<인조실록> 42, 인조 19(1641) 710

 

광해군이 이달 1일 을해에 제주에서 위리 안치된 가운데 죽었는데 나이 67세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사흘 동안 철조하였다. 이때에 이시방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빈(斂殯 : 시체가 썩지 않도록 예를 다하여 모시는 일)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르다고 하였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그후 이시방은 자신이 제주(祭主)를 되고 제주향교의 교생을 뽑아 집사를 맡겨서 시신을 입관했다.

인조는 광해군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장례를 주관하게 했다. 채유후는 제주도에 도착해 727일에 관덕정 앞에서 대제(大祭)를 행하고, 818일에 주검을 운구했다. 운구하는데 제주에서 1개월, 남양주까지 2개월이 소요되었음에도 한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어도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생각했던 이시방을 비롯한 관리들이 광해군의 죽음 이후의 장례절차를 정성을 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관덕정 옆에 있는 광해군 유배터

'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 제주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관덕정  (0) 2021.02.19
제주도의 하멜표류기  (0) 2021.01.17
제주도 삼성혈  (0) 2020.12.27
제주도 평화박물관  (0) 2017.12.25
평화박물관  (0) 2017.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