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출범

윤의사 2024. 2. 12. 11:10

1010, 신군은 일시에 총독부를 습격하였다.(1010일은 오늘날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의 국경일로 정해져 있다) 동맹회 혁명 세력과 일반 민중들이 곧바로 여기에 가세하였다. 사태를 직감한 무창성(武昌城)의 총독은 상해로 도망을 쳐버렸고, 혁명군은 순식간에 무창성을 점령하였다.

우리들은 대개 하사관급의 낮은 병사들요. 우리를 지도해야 할 손문 선생과는 연락이 닿지 않으므로 어서 지도자를 뽑아서 조직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 중에서 최고 높은 어른은 여원홍 여단장님일 것이요. 이 분을 우리의 지도자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리고 무창에 남아있던 여단장 여원홍(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면서 선언하였다.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에 의한 나라를 세우자!”

이른바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무한(武漢) 봉기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본토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일본에 남아있던 유학생들은 속속 고국으로 돌아와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중국혁명동맹회 집행위원장이던 황흥은 무창 봉기를 직접 지휘하였고, 진기미는 상해에서 무장봉기를 결사적으로 일으켜 성공시켰다. 그리고 혁명 후에 중국혁명동맹회를 새롭게 조직하여 국민당 결성을 주도하고 헌법제정과 정당정치의 실현에 노력한 탁월한 정치가 송교인도 활약하였다.

북경의 청나라는 진압을 위하여 증원군을 파견하였지만 한구, 한양, 무창 등, 무한 3진을 이미 점령한 혁명군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다. 혁명운동은 중국 각지로 번져갔고, 2개월 만에 14개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미국에 있던 손문이 귀국하여 남경에 있던 17개 성의 대표들과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중화민국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가결하면서 임시총통으로 손문을 선출하였다. 마침내 191211일 손문은 중화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오늘 우리는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수도를 남경으로 하노라!”

그러나 남경 정부에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혁명정부를 비롯한 몇 개의 각 지역의 군벌의 연합 정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혁명정부와 각 군벌 간에는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리고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던 일본이 재정적인 지원을 거절하고 민간인 자산가들의 자금 조달도 끊어지자 재정이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서구 열강들도 남경 정부의 승인을 보류하고 있었다.

이에 힘입은 청 조정은 혁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벌였다.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북양군벌 원세개 정도입니다.”

청 조정은 원세개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혁명군의 열기가 북쪽으로 영향을 몰고 오자 원세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사태수습을 맡겼다. 원세개는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신군을 선발하여 직접 이끌고 무한 3진의 탈환에 나섰다. 그리하여 단기간에 한양, 한구 등을 회복하고 무창을 향하여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혁명군을 진압하겠다는 원세개였지만 내심 군주제의 폐지를 바라고 있었다. 원세개는 혁명군에게 화해를 요청하였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었기에 손문은 큰 결심을 하였다.

좋소. 외세의 침략도 있고 하니 분열된 중국보다는 하나의 중국이 되어야겠소. ”

손문의 결심으로 원세개와 타협이 이루어졌다.

원세개는 곧 청조정에 압력을 가하였다.

조용히 황위를 물러나시면 황실과 황족에 대한 예우는 변함이 없을 것이오, 또한 만주족과 몽골, 티벳족에 대해서도 한족과 평등하게 대우할 것이오...”

1912212, 말 그대로 황제 선통제는 조용히 옥좌를 내놓았다. 277년 청조의 역사는 이렇게 마감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원세개는 310일 임시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면 신해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 1혁명이라고도 하는 신해혁명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3천 년간 유지되어온 전제 왕조가 역사의 막을 내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원세개의 배신이 있었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정을 수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가 계속되었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 고착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으며 1919년의 5.4운동이라는 국민 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제기되었다. 신해혁명은 확실히 미완의 혁명이었다.(민병덕의 <반역의 세계사>)

손문과 원세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