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지평리전투가 시작

윤의사 2024. 2. 13. 20:17

폴 프리먼은 주로 참모로 근무하였다. 전쟁터에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는 현장에 맞는 병력배치와 눈부신 리더십으로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혁혁한 공로를 세운 뒷날 미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오른다.

육사에서는 프리먼이 지휘한 지평리전투의 전술을 육사 교본에도 남겨 생도들이 배우고 있다.

지평리에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활약해 적을 물리쳤다. 중공군은 미군의 네이팜탄을 피해 낮에는 산속에 참호를 파고 숨 죽인듯 있다가 밤에만 귀신처럼 움직여 유령부대라 불렸다. 밤에만 출몰해 게릴라전을 펼치는 중공군의 유령들에게 UN군은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할 지경에 이르러 도쿄 UN군사령부에서 한반도 포기나 다름없는 철군론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인 릿지웨이는 패전의 불명예도, 철군에도 강력 반대했다.

 

195010월에 한국전에 투입된 중공군으로 1.4후퇴를 해야만 했고,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내줬다.

그 뒤 UN군은 평택-원주-삼척 전선에서 전열을 정비해 1951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인접 부대와 보폭을 맞춰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고 횡 방향 연결을 통해 중공군의 습격과 보급로를 확보하는 작전이었다. 썬더볼트 및 라운드업, 킬러, 리퍼, 러기드, 돈틀리스 작전으로 진행된 반격 때부터 전술을 바꿨다. UN군이 한강을 수복하자 중공군은 지평리 주둔 UN군을 밀어내고 남한강 넘어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국군과 미군은 유령부대의 공격에 무너져 단 하루 전투에 아군 7500여 명이 전사했다.

19512월 13일, 지평리에 투입된 2사단 23연대장인 폴 프리먼은 한국전에서 중요한 고지 선점의 이점을 마다하고 평야와 얕은 구릉을 따라 사각형의 진지를 구축해 병력 밀도를 높이려 했다. 방어선에서 높은 고지는 240m 정도로 중공군의 400m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23연대 주둔지는 중공군의 포격에는 어쩔 수 없지만 기관총의 사거리는 아니었다. 진지 안에는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면서 만약을 대비해 간이활주로를 만들어 항공보급이 가능하게 했다.

평야를 거쳐 구릉으로 올라오는 중공군은 23연대 장병의 눈에 잘 보였다. 중공군의 거센공격이 지속되었고, 중공군의 집중 공격으로 한때 맥기언덕(소대장 맥기 중위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언덕)이 위험했으나 포격과 항공 지원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맥기언덕에서는 소대원 중 맥기 중위와 3명만 생존했을 정도였다.

지평리 전투에는 폴 프리먼 대령이 지휘하는 미 23연대전투단과 프랑스 1개 대대가 함께 했다. 프랑스 대대를 이끈 사람은 1, 2차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전투에서 18번 부상하고, 18개 훈장을 받은 랄프 몽클라르였다. 그는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지만, 현역 당시보다 4계급 강등한 중령 계급으로 대대의 지휘관을 자청했다. 국방차관이 걱정하면서 만류하자 태어날 자식에게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면서 참전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싸워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몽클라르가 이끈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며 용맹을 과시해 중공의 팽덕회(펑더후이) 사령관이 김일성의 강한 반발에도 후퇴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결국 2월 16일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얻은 최초의 전술적, 작전적 승리이다. 지평리전투 이후 유엔군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38도선을 회복하는 반격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종북친중세력들은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한 이방인들의 희생덕분에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것에 감사드린다.(사진: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