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3

오늘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을 밝혔다. 윌슨은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였다. 윌슨의 주장은 1차 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의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1차 대전의 승전국의 식민지는 해당 사항이 없으며, 패전국이나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일부 약소민족에게만 적용되었다. 즉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서 민족자결주의와 관련된 대부분의 조항은 실제로는 발칸반도 및 동유럽의 패전국 영토에 귀속되어 있던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

대마도는 한국 땅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1월 7일 내,외신 기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고 전격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배상 요구는 어느 시기까지로 한정할 것인가?" 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쳐온 속지나 마찬가지였는데, 350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무력 강점한 뒤 일본 영토가 되었고, 이때 결사항전한 의병들의 전적비가 도처에 있다" 며 배경을 설명했다.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이 대통령의 주장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일본 주장에 대한 대응, 앞으로 있을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이 대통령의 고도의 외교술이었지만, 일본의 요시다 총리가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오늘은 교복자율화 방안 발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학생들에게 전쟁이 나면 바로 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복 겸해서 입힌 것이 교복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1886년 이화학당학생들이 똑같은 다홍색치마 저고리를 입고 다니면서부터 시작됐다. 배재 학당 남학생들도 l896년부터 단발령에 따라 짧은 머리에 통일된 교복을 입었다. 군복을 닯은「쓰메·에리」교복이 등장한 것은 1909년 경신중 졸업식 때였다. 일반적으로 교복은 남학생은 한복바지 저고리에 검정두루마기가, 여학생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였으며, 학교를 구별하기위해 치마아랫 단에 흰줄을 두르기도 했다. 일제식민지 시절 학생군사훈련과 학도병 동원을 위해 까만 군복형 교복에 둥근모자로 통일하였다. 1982년 1월 4일 교복자율호방안이 발표되기 이전까지 남학생은 빡빡 깎은 중머리..

갑진년에 일어난 일들은?

404년 광개토대왕이 대방(帶方)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전멸시키다 1724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조선 21대 임금으로 즉위하다 1904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어 ‘한일의정서’가 맺어져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 베트남전쟁에 한국 군인이 파병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일본은 1904년 2월 6일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10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하려고 하자, 2월 9일 인천을 통해 임시'한국주차대'를 서울로 진주시켰다. 한국주차대는 '한국에서 영구히 주둔하라'는 이름이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협박하면서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에..

오늘은 수인선 협궤열차 폐선

수원역과 인천역을 연결하는 총연장 52km, 궤도폭 0.762m. 1935년에 착공해서 1937년 8월 5일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의 사설철도로 개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여주와 이천의 쌀을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수여선 (수원-여주, 총 연장 73.4km) 과 수인선을 협궤철도로 건설하였다. 또한 경기만의 소래·남동·군자 염전의 소금을 수송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수원-인천 간 국도의 개통으로 산업철도로서의 기능을 잃고 1977년부터는 화물운송이 중단되었다. 이후 경기 내륙지역 주민들이 소래나 사리 등에서 새우젓 등 어물을 운반하거나, 경기도 서부 지역( 달월·군자·원곡 등지)학생들이 수원이나 인천으로 통학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필자도 어머니를 따라 수인선을 타고 소래에서 새우젖..

오늘은 동지

우리 조상들은 하지 이후 짧아지는 낮의 길이가 동지를 거쳐 길어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어르신들 중에 ‘동지첨치(冬至添齒)’라 하여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궁중에서는 설날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잔칫날로 생각해 회례연(會禮宴, 잔치)을 열었다. 그리고 해마다 예물을 준비해 동지사(冬至使)를 중국에 파견하여 동지를 축하하였다. 조선 후기 홍석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 에 “관상감(觀象監 : 조선시대 천문과 날씨 일을 맡았던 관청)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린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

오늘은 매헌윤봉길의사 순국일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의사님이 두 아들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로 남긴 유시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자신이 걸었던 조국독립의 길을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를 담고 있듯이 살신구국하려는 그의 비장하고 비통한 심정을 느끼게 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의사님의 수통 폭탄 의거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 국가들을 단결시켰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의사님을 비롯한 선열들의 높은 기개와 불굴의 의지에 힘입어, 우리 ..

오늘은 '엿 먹어라'의 말의 기원이

1965학년도 서울 지역 전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출제된 자연 문제의 하나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즙 파동'이다. 1964년 12월 7일에 실시한 '1965년도 '전기 중학 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에서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라는 당시 자연과목 18번 문제의 정답에서 불거진 말이다. 서울시 공동출제위원회는 보기 1번 '디아스타제'를 정답이라고 발표했으나, 2번 '무즙'을 답이라고 선택했다가 낙방한 수험생들과 학부모 20여 명이 1964년 12월 22일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즙도 답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학부모들에 의하면 당시 김원규 서울시교육감이 “만약 무즙으로 엿이 된다면 자연 18번..

오늘은 의병장 최익현 태어남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은 조선 후기 유명한 유학자인 이항로의 제자이다. 대원군의 경복궁 복원 공사, 당백전 발행 등을 비판하여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이후 정부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자 이를 거세게 비판하였으며, 나중에 의병 운동을 이끌다가 쓰시마 섬에서 죽었다.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다. 최익현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이항로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뒤에는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흥선 대원군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에도 왕비를 등에 업고 설치는 민씨 일파의 잘못을 밝히려다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어학회 창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는 한글학회이다. 1908년 8월 31일 지금의 연세대 옆 안산의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 됨의 특별한 빛"이므로 “말글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는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우리 말글 연구로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자며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글학회의 뿌리다. 1911년에는 학회 이름을 “배달말글몯음(朝鮮言文會)”으로 바꾸고, 국어강습소도 “조선어강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넓혔다. 1913년 학회 이름을 “한글모”로 바꾸고, 1914년 4월에는 조선어강습원을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3개월 후 7월 27일 주시경 선생이 망명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운명하셨다. 주시경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921년 12월 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