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99

12월 22일 오늘의 역사, 한국 침략의 원흉 이또가 일본 초대 총리가 되다

이또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周防國村)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인 하야시 주조(林十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중인인 이토 다케베(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어 성을 이토(伊藤)로, 이또 히로부미도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게 된다. 이또는 1857년 '존왕양이'(천황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배척한다)를 외치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어 신분 차별을 하지 않는 스승에 감동에 학문에 열중했다. 스승이 막부에 의해 사형을 당하자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에 가입해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막부가 ‘천황 폐위의 전례를 ..

12월 15일 오늘의 역사, 흥남철수작전 개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4일 평양, 12월 24일 흥남에서 철수했고, 12월 말에는 삼십팔도선 이북을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남하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함락하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정하고 서울을 철수하였다. 1951년 3월 18일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수복했으며, 이후 전쟁은 삼팔선 부근에서 국지전으로 전개되었다. 1·4 후퇴 이후 부산은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1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주택난으로 일본인들이 공동묘지로 조성한 아미동에 비석을 뽑아 계단과 집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했다.피난민들은 ‘귀신보다도 배고픔과 집 없는 것이 더 무서웠다’고 전했다.피난민들은 이전부터 많이 알려진 도개교인 영도다리에서 가족끼리 만나자고 약속해 영도다리도 늘 ..

12월14일 오늘의 역사, 아문센이 남극점 도달

아문센 (1872~1928) 은 캐나다 북쪽 해안과 베링해를 거쳐 태평양을 연결하는 북서항로를 개척하였다.1903년 3년치 식량을 준비한 아문센은 그조아(Gjoa)호를 타고 킹윌리엄 섬에 도착했다.이곳에서 1904년까지 2번의 추운 겨울을 지내며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추운 지역에서 사는 방법을 배웠다.바다가 녹자  아문센은 1905년 8월 13일 그조아호를 타고 서쪽으로 출발해 캐나다 북쪽 해안 서쪽 끝, 베링해를 거쳐 태평양을 통과했다. 곧 인류 최초로 북서항로를 통과한 사람이라는 영광이 아문센에게 돌아갔다.아문센은 문명인이라는 유럽인이 만든 가장 따뜻한 옷보다 원주민이 만든 순록 모피 옷이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영국이 항로를 개척하면 주기로 했던 상금을 엉뚱한 사람에게 주었다.이는 영국이 막..

12월9일 오늘의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광복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1940년 9월에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광복군은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면서 모병(募兵)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1942년에는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어 대일 항전을 벌이던 조선의용대와 연합하여 규모가 커졌다.김원봉은 광복군의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9일에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의 한 나라로 대일전에 참전한 셈이 되었다.1944년에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일부의 병력을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다.파견된 광복군은 영국군과 협조하여 포로 심문, 회유 방송, 선전 ..

12월 8일 오늘의 역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남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반대해, 민족주의 사관을 세워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한국사의 여러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켜 근대 역사학의 기틀을 다졌다. 호는 단재이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도리산리(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묘지기가 살던 허름한 집을 빌려 살 정도로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현재의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열 살 때 벌써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고,시와 글에도 뛰어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신채호는 열아홉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잠시 감옥에 갇히기도 하..

12월2일 오늘의 역사, 몰타회담

오늘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인 냉전(冷戰) 시대를 끝낸 미국과  소련 간 정상회담인 몰타 회담이 열렸다.몰타회담 (Malta-summit)은 1989년 12월 2일과 3일 지중해 몰타 해역의 배 위에서 미국의 조지HW 부시 대통령과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가진 회담이다.  두 정상은 동유럽의 민주화, 미국과 소련의 군비축소, 경제협력 체제 만들기 등을 주제로 회담을 열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의 냉전으로 사사건건 대립해 '총성없는 전쟁'을 하던 두 나라가 화해의 악수를 한 것이다.미국과 소련은 세계를 이끈다는 명목으로 핵무기 경쟁, 우주발사체 경쟁 등을 펼쳤다.그런데 인도 등 제3세계 등장과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핵무기를 보유하면서 동서진영의 양극체제는 무너졌다.이제 이념을 가지..

12월2일 오늘의 역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탄생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종교인이다. 대종교를 만들어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철은 고종 때인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였다.승문원권지부정자와 징세서장으로 일하다가,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그 뒤 미국 유학을 가려고 일본에 들러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치인들에게 전달하면서 3일간 음식을 먹지 않고 농성을 하였다. 그곳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였다.그리고 나라를 팔아넘긴 을사오적을 암살하여 민족의 울분을 달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나철은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

12월 1일 오늘의 역사, '대한제국의 꿈' 덕수궁 석조전이 완공되다

오늘로부터 114년 전인 1910년 12월 1일, 덕수궁에 완공됐다. 덕수궁은 고종이 1919년 1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낸 궁궐이다.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1920년부터 일제는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팔아서 궁궐이 크게 줄어들었다.한국의 대표적인 그리스 로마양식의 복고로 서양에 유행하였던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신고전주의를 따른 석조전은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하여 지어진 것이다.그러나 1904년 일본인 고문 메가다와 교체되면서 조선의 마지막 왕실을 상징하는 석조전이 그에 의해 1910년 12월 1일 정면 54m, 너비 31m에 달하는 웅장한 3층 석조 건물로 연건평 1,247평으로 완공되었다.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건축된 ..

11월22일 오늘의 역사, 카이로 회담

대한민국의 독립을 처음 거론한 회담이 바로 카이로 회담이다.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지금은 잊힌 역사의 한 장면이 된 듯하다.카이로 회담은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승리를 확신한 연합국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장제스(蔣介石)가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2차 세계대전 전쟁 작전 수행과 전후처리에 대하여 논의한 군사 회담이었다. 카이로 회담 이후 루스벨트와 처칠이 테헤란으로 이동해 스탈린과 가진 회담에서 전시 작전과 노르망디상륙작전을 결정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결의한 카이로 선언에 동의해 12월 1일 공식 발표됐다. 대한민국 독립을 보장한 첫 회담이 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자유 독립시킬 ..

11월18일 오늘의 역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의회의 비준을 거쳐 발효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으로 한국(남한) 방위를 위하여 최초로 외국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 지금까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38선 부근에서 6.25전쟁이 공방전으로 교착상태에 놓이자, 1951년 6월부터 미국과 구 소련간에 휴전이 제의되었다. 이에 7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한국은 휴전을 반대하였다. 한국은 우리의 뜻과 달리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미국에게 휴전조건으로 한미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미국에선 1953년 6월 대통령특사인 로버트슨이 내한하여 외교적 교섭을 하고, 8월에는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내한해 한미방위조약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