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또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周防國村)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인 하야시 주조(林十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중인인 이토 다케베(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어 성을 이토(伊藤)로, 이또 히로부미도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게 된다.
이또는 1857년 '존왕양이'(천황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배척한다)를 외치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어 신분 차별을 하지 않는 스승에 감동에 학문에 열중했다. 스승이 막부에 의해 사형을 당하자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에 가입해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막부가 ‘천황 폐위의 전례를 조사하라’는 것에 응한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하는 등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았다. 존왕양이 활동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정식 무사계급으로 신분이 올라갔다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조슈번의 젊은 인재들과 영국 유학길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는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서 UCL 대학 화학 교수 집에 머물며 영어와 영국식 예절을 배우고 해군 시설, 조선소들을 견학하며 대영제국의 발전된 모습과 일본과의 격차를 보며 개국론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1년 예정의 유학은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에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과 조슈번 사이에서 협상을 중개하면서 배상금 300만 달러를 막부가 책임지게 하여 영어 실력과 외교술을 인정받았다. 이때 서양식 무기를 확보해 천황제를 통한 일본제국 건설을 내세운 다카스기와 힘을 합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만들었다.
이또는 메이지 천황의 시대에서 영어 실력으로 28세에 효고현의 지사가 되었다. 1871년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시정하려다 실패하고, 유럽으로 향하여 대영제국, 프랑스를 거쳐 신흥 제국 독일에 도착해 독일을 통일시킨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났다. 비스마르크는 '소국은 국제법을 지키려 하나 대국은 스스로에 이익이 되면 그것을 고집하고 일단 불리하게 되면 군대를 바탕으로 그것을 짓밟는다' 말에 감동 받고 귀국해 38세에 내무 대신이 되었다
일본은 독일을 롤모델로 삼아 헌법 및 의회를 개혁한 새로운 내각 제도를 도입하고, 이또는 1885년 12월 22일 최고 권력자인 총리가 되었다.(그는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총리로 재임했다)
천황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정치적 실권이 없었으나, 이후 이또 히로부미에게 의지하며 권력을 키웠다. 하지만 이또 히로부미가 정치적 라이벌인 오쿠마 시게노부의 딸과 부정한 행위를 하는 등 여성 편력이 심해 달가워하지 않았다.
총리로 헌법과 황실제도의 틀을 완성하고는 1888년 5월 8일에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구성되자 스스로 총리를 그만두고 초대 의장이 되어 1889년 2월에 헌법을 완성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히로시마에 육해군을 총지휘하는 대본영을 설치하고 군함을 건조해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시모노세키 불평등 조약을 통해 많은 이권을 차지해 황족을 제외한 일본인 최초로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그는 천왕이 임명하는 '원로'로 정책 최종 결정권자가 되어 영국과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영국은 청에,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우위권을 인정받았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 유리한 국면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얻고 러시아는 전쟁 배상금을 내지 않는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를 이끈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 5적과 더불어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해 한국 지배를 확고하게 다졌다.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니 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의 식민지를 하려는 계획을 통고하기 위해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을 갖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3발의 총탄에 오전 10시에 죽었다.
일본인들은 그를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낳게 한 전범이라고 하겠다. 또한 테러리스트이면서 호색한(好色)한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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