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4일 평양, 12월 24일 흥남에서 철수했고, 12월 말에는 삼십팔도선 이북을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남하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함락하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정하고 서울을 철수하였다. 1951년 3월 18일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수복했으며, 이후 전쟁은 삼팔선 부근에서 국지전으로 전개되었다.
1·4 후퇴 이후 부산은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1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택난으로 일본인들이 공동묘지로 조성한 아미동에 비석을 뽑아 계단과 집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피난민들은 ‘귀신보다도 배고픔과 집 없는 것이 더 무서웠다’고 전했다.
피난민들은 이전부터 많이 알려진 도개교인 영도다리에서 가족끼리 만나자고 약속해 영도다리도 늘 붐볐다고 한다.
피난민 중에는 이중섭과 같은 예술인들도 많이 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 사이에 이루어진 흥남철수는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9만 8,100여 명이 193회의 배를 이용한 수송을 통해 철수한 것으로, 가수 현인이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가요로 널리 알려졌다. 피난민은 38도선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의 점령군 행세와 북한을 점령한 공산당의 만행으로 믿음이 사라진 반면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믿음은 두터웠기에 흥남에 모였던 것이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 때문에 피난민 수송에 난색을 표했지만,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를 버리고 남는 공간에 피난민을 태웠다.
피난민은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포함해 전차상륙함 등을 이용해 9만 8,100여 명의 피난민이 흥남과 원산을 통해 38도선
이남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국군의 설득과 미군에 의한 흥남철수작전은 전쟁 현장에서는 찾기 힘든 인간 존엄성과 인류애를 보여준 현장이었다. 자유주의, 인도주의, 평화주의를 보여준 미군의 작전은 영화 <국제시장 >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사진:영화진흥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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