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광복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0년 9월에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면서 모병(募兵)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42년에는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어 대일 항전을 벌이던 조선의용대와 연합하여 규모가 커졌다.
김원봉은 광복군의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9일에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의 한 나라로 대일전에 참전한 셈이 되었다.
1944년에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일부의 병력을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다.
파견된 광복군은 영국군과 협조하여 포로 심문, 회유 방송, 선전 전단의 작성, 암호문 번역 등의
업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소규모의 연락대였으나,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1945년에 시안에 주둔한 광복군 제2지대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본토 진입 작전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중심 인물은 제2지대장 이범석과 탈출한 학도병으로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50 명이었으나,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여 본토 진입 작전은 실행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945년 3월에 광복군과 미국 전략 특수 공작대(OSS)와의 사이에
한․미 군사 합작 합의 사항이 서명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한․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한다.
-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기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에게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 직속으로 지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이었으며, 1941년 오늘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연합군에 편입시켜 사이판과 필리핀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미국 육군 전략첩보국에서 훈련을 받으며 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잇따라
투하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중국군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사실을 전해들은 김구 주석은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라면서 한스러워 하였다.
국내진입작전의 성공으로 당당한 전승국의 일원이 되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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