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2월 8일 오늘의 역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남

윤의사 2024. 12. 8. 10:45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반대해, 민족주의 사관을 세워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

한국사의 여러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켜 근대 역사학의 기틀을 다졌다. 호는 단재이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도리산리(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묘지기가 살던 허름한 집을 빌려 살 정도로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현재의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열 살 때 벌써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와 글에도 뛰어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신채호는 열아홉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잠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 뒤 고향에 내려와 직접 세운 산동학원을 비롯한 여러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계몽 활동을 폈다.

 

신채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위원)이 되어 날카로운 논설을 통해 정부를 비판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1907년에는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만들고, 이 무렵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돕는 논설을 자주 실었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뒤, 신채호는 나라 밖에 독립 운동 기지를 세우는 일에 나섰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복회를 만드는 한편,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그 뒤로 상하이, 베이징 등을 다니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미국에 기대 독립을 얻으려는 이승만을 비판하며 임시 정부를 떠났다.

그 뒤 신채호는 스스로 무력을 키워야만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독립군 통합에 힘쓰는 한편,

일본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기 위한 의열단을 구성하였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로까지 발전하였는데, 1928년에 민족 잡지인 <탈환>을 발간하였다.

 

신채호는 한평생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에 역사와 관련된 논설을 많이 싣고, <최영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과 같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힘써,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펴냈다.

신채호는 이처럼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데 반대해 민족주의 사관을 바로 잡았고,

한국 역사학의 여러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시켰다.

 

서울에 있던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16세)은

“신채호 뇌일혈,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장례절차를 준비하여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의식도 없는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신채호를 보았으나,

일제 간수들이 면회시간만 고집하자 여러 번 간청했으나 쫓겨나고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홀로 생을 마쳤다.

신채호 선생

 

신채호 선생이 안창호선생에게 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