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3

오늘은 학생의 날

1919년 3·1운동 이후 10년만인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문화정치로 인한 한국인을 이간질해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이 약화되었던 순간다시 한번 전국적인 항일운동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차별적 교육 철폐,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을 주장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어 1930년 3월 말까지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로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지 30년 후, 당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의 참여로 광주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

오늘은 한국 근대 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 창간

1883년 10월 31일, 한국 근대 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이는 한국인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었으며,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였다. 1882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일행으로 일본에 가 백성들을 계몽하려면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신문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자와 인쇄공 등 일본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에게 신문이 필요하다는 점을 건의하니 1883년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도록 허락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다. 한성순보는 순 한문의 관보성격으로 작성되었고 한 달에 세 번 발행됐으며 전체 18면이 제본된 잡지 형태였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 신문을 널리 ..

오늘은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인 댕기머리사건 발생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다. 예전엔 '학생의 날'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목적으로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와 광주를 오가던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이른바 '댕기머리 사건'이 계기였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의 댕기머리를 당기며 희롱했다. 이 광경을 본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가 격분해 후쿠다를 꾸짖었다. 박준채는 박기옥의 사촌동생이다. 후쿠다는 사과는 하지않고 오히려 ‘조센징’이라고 희롱하였다. 이에 박준채의 주먹이 후쿠다에게 날아갔다. 그러자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억눌려 있던 한국인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출동한 일..

오늘은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한글은 1894년 11월 21일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칙령 제1호 공문식을 공포하여 ‘법률 명령은 국문을 본(本)으로 삼고 한역을 부(附)하며, 국·한자를 혼용한다’라는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공용문자가 됐다. 1907년 한글 규범화를 위한 국가 연구기관으로 학부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글맞춤법 정비작업을 시작했으나,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1909년에 해체됐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제정하고, 이를 조선어 교과서에 적용했으며 1920년에 『조선어사전』도 편찬했다. 물론 조선총독부 ‘어문정책’의 목표는 일본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일제의 한글 정책은 식민지 교육정책인 한국인을 심부름꾼으로 양성하는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고, 『조선어사전』 은 일본어를 찾기 위한 ..

오늘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

白日靑天霹靂聲(백일청천벽력성/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대주제자혼담경/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영웅일로간웅폐/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독립삼호조국생/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총장 등을 지낸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감동해 지은 시이다. 안 의사는 190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원동보(遠東報)〉를 통해 이또오 히로부미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111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또오 히로부미..

오늘은 독도의 날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 은 187,554㎡로 울릉도와 단 87.4km 차이로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독도의 역사는 512년, 신라 시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부속도서인 독도를 우산도로, 울릉도를 무릉도로 부르게 되었다. 두 섬을 합쳐서 우산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96년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본 에도막부가 인정하도록 했다. 1471년, 독도는 삼봉도(三峰島)로 명칭을 변경한다. 을 살펴보면 독도를 ‘세 개의 큰 봉우리를 가진 섬’이라는 뜻의 ‘삼봉도’로 기술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794년, 독도의 세 번째 이름은 가지도(可支島)이다. 당시 독도..

오늘은 중양절

53권, 세종 13년(1431) 9월 12일 의정부와 제조에 의논하기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정조(正朝)·답청(踏靑:3월3일,삼진날)·단오·유두(流頭)·칠석(七夕)·중추(中秋)·중구(重九:9월9일, 중양절) ·동지(冬至) 등 속절(俗節)에는 위연(慰宴)을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위의 여러 속절은 너무 많아서 번거로울 듯하오니, 유두와 칠석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 여섯 명절에만 위연을 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그러나, 사신이 서울에 있으면 가하거니와, 만약 먼 지방에 가 있으면, 여섯 명절에 다 사람을 보내어 위연을 베풀기는 폐가 적지 아니할 것이오니, 설과 동지에는 비록 먼 지방에 가 있을지라도 사람을 보내어 위로함이 가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오늘은 음력 ..

오늘은 청산리대첩의 주역, 이범석 장군 출생

이범석 장군은 서울에서 1900년 10월 20일 아버지 이문하와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왕족의 후손으로 넉넉한 경제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생활했고, 아버지 이문하는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찌기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킬 정도였다. 노비였지만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못하던 정태규를 이문하가 대한제국군으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이범석의 집을 떠났어도 늘 형제같이 챙겨주던 정태규는정미 7조약으로 군대 해산이 되자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항일투쟁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쑨원의 소개로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에 입학해 1919년 수석으로 졸업하자 구대장 서가기가 자기의 기(驥..

오늘은 여수,순천반란사건 발생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정부는 진압작전을 위해 여수·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를 10월 19일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14연대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인민해방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지창수는 ‘병사 소비에트(남로당 지방도당에서 관리하는 병사)’에 소속돼 있었고, 김지회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반란군은 10월 19일 저녁 8시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 나팔을 불어 전 연대병력을 집합시켜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참여하게 하여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했다. 그리고 여..

오늘은 조만식 선생 서거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정치가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민족 자본을 키우고,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나갔다. 일제에 대해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정신으로 대항해 ‘조선의 간디’로 불린 민족의 지도자였다. 호는 고당이다. 오늘 10월 18일은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만 73년이 되는 날이다. 조만식은 하나뿐인 아들을 잘 가르치려는 부모의 정성 때문에 여섯 살 때부터 스승을 두고 공부하였다. 그는 열다섯 살 무렵에 상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해, 젊은 나이에 번듯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술자리가 잦아 건강을 해치자, 친구의 권유로 술과 담배를 끊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예 사업을 접고 숭실중학교에 다녔는데, 그 시절에 듣게 된 도산 안창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