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427

한양도성 사대문

숭례문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의 모습을 보고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이 ‘예(禮)를 숭상하자’는 뜻을 상징하는 나라의 큰 문입니다. 동양에서는 공자이래로 예가 정치의 근본을 이루었으며, 국가나 가정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으로 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므로 숭례문은 사람이 오고가는 문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조선을 상징하는 문이라 하겠지요. 우리 역사를 보통 전란의 역사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란이 있었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적의 큰 침입부터 현대에 와서는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4.19혁명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백성들의 애환을 함께 느끼며 유지했던 숭례문이었는데, 2008년 2월 70대 정신 나간 노인 한 사람의 어이없는 방화에 ..

한양도성 사대문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한양도성을 건설하면서 4개의 대문과 4개의 작은문(소문:小門)을 만들었다. 한자에서 인(仁)은 동(東), 의(義)는 서(西), 예(禮)는 남(南), 지(智)는 북(北)의 방향을 가리킨다. 인의예지는 때로 책의 순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한강도성의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 했다.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지(智)가 아닌 정(靖)을 사용한 것은 ‘외척이 나라 정치에 간섭을 막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편안하길 바란다’는 정도전의 뜻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흥인지문 한양도성이 건설될 때 만들어진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태조 5년(1396)에 처음 만들어지고, 단종 1년(1453)에,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각각 ..

조선 왕릉 사릉

사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에 위치한 단종 왕후인 정순왕후 송씨의 단릉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올렸다. 단종과의 만남은 단종의 큰할아버지인 양녕대군과 숙부인 수양대군의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가례를 올린 지 1년 만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어려움이 닥쳤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알려 세조가 알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고, 나중에는 관비가 되었다..

한양도성 창의문

서쪽에는 인왕산을, 동쪽에는 북악산을 이어주는 문이 자하문(紫霞門)이다. 북소문으로 창의문(彰義門)으로 불린다. 아마도 '인조반정'을 예견한 듯 하다. '의로움을 만천하에 드러내다.'라는 뜻이니... 그러나 중립외교로 외적의 침입을 막았던 광해군을 서인으로 내몰고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창의문 밖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보가 광해군에게 미리 알려졌으나,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으려 하였다. 훈련대장 이흥립에게 궁성을 호위하게 했으나, 김류, 이귀의 반정군과 합세하였다. 안개로 바로 앞도 분간하게 힘들었으나, 반정군이 창의문을 나서자 바람도 멈추고 달이 밝아 길을 밝혔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이용되지 않았기에 창의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네가 많아 지네의 천적인 닭을 문루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