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사릉

윤의사 2019. 10. 13. 11:43

사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에 위치한 단종 왕후인 정순왕후 송씨의 단릉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올렸다.

단종과의 만남은 단종의 큰할아버지인 양녕대군과 숙부인 수양대군의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가례를 올린 지 1년 만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어려움이 닥쳤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알려 세조가 알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고,

나중에는 관비가 되었다.

세종과 문종의 사랑을 받았던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의 노비로 달라고 요청하자, 세조는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정업원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후궁 중에 자식이 없거나

혼인 후 남편과 사별한 왕실의 여인들이 사는 곳이다.

신숙주는 양심도 없었던 사람인지...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지치라는 식물을 이용하여 염색업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세조가 정순왕후가 어렵게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남편을 생각하면서 거절하였다.

정순왕후의 생활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의 아녀자들이

신설동 동묘 근처에 위치한 남자들은 출입을 금하는

여인들만의 채소시장에서 얻은 수입으로 도왔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임을 당한 후 64년 동안 그리다가

82세로 정업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인 해주 정씨 정미수였다.

중종이 대군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라는 명을 내린 후

왕릉처럼 능침을 조성하지 못했다.

더구나 왕릉 주변에는 사가(私家)의 묘를 조성하지 못하지만,

해주 정씨의 묘역에 조성되었다.

숙종 때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존되어

해주 정씨의 묘들도 정비가 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칭하였다.

 

 

 

사릉 전경

 

홍살문에서 바라본 사릉

 

정자각, 다른 정자각과 배위청이 작아 정사각형 모양이다.

 

신도비

 

예감, 제례가 끝난 후 제물을 붇거나 지방을 태우던 곳으로

두껑이 나무로 되어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돌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껑이 원래의 것인지는 전문가들 간에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고 한다.

 

능침 공간, 삼면이 곡장으로 둘러쌓여있고, 병풍석이나 호석이 보이지 않는다.

망주석과 문인석, 장명등으로 단촐하다

 

단종이 묻힌 장릉의 장명등과 함께 조선시대 유이하게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장명등,

왕조와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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