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건릉

윤의사 2020. 4. 23. 11:15

융건릉은 용주사에서 서쪽으로 약 1킬로미터 정도 가면 도착한다.

정문 오른편에 있는 융릉은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일명 : 사도세자, 후에 장조로 추존)와 경의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왼편의 건릉은 정조와 효의 왕후의 합장릉이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것을 항상 슬퍼하며 지냈다.

그래서 양주 배봉산에 있는 현릉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다.

어느 날 정조대왕이 융릉을 찾았는데,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많아 소나무를 갉아 먹자,

정조대왕이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

꾸짖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문에 화성이 효의 고장이 되었다.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궁성 밖 시찰을  더 많이 실시하였다.

역대 왕릉을 간다는 구실로 백성을 직접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는

상언이나 격쟁의 기록이 5.000건이 넘을 정도이다.

실제 100회 이상의 행차를 통해 민의를 수렴한 것이다.

아버지 장조의 릉참배도 마찬가지이다.

죽은 후 부모님 곁에 있고 싶어 영의정 채제공에게에게

"내가 죽거든 현륭원에 묻어주오."

라는 유언에 따라 융릉에서 서쪽으로 두 언덕을 넘어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융릉 동쪽에 모셔졌으나 묘자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에 다라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가 죽은 후 합장하며 현재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융릉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병풍석 대신 난간석으로 만들어졌다.

장명등은 융릉과 같이 용무늬가 있어 한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유석에는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의 무늬를 넣었다.

난간석에는 방향을 표시하기 위한 간지가 문자로 표시되어 있다.

문인석의 얼굴은 정조의 인품만큼이나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다.

 

 

정자각과 건릉

 

비각

 

묘비

 

정자각

 

건릉 전경

 

장명등, 용문양이 있다.

 

혼유석

 

문,무인석. 문인석의 입가에 미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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