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427

제주도 삼성혈

제주도 건국신화는 흔히 삼성신화(三姓神話), 즉 제주 고(高)씨와 양(梁)씨, 부(夫)씨의 시조신화가 있다. 삼성혈의 세 구명은 아무리 비가 와도 빗물이 고이지 않고 눈이 와도 금세 녹아버린다고 한다. 실제 그 구멍에서 제주 사람들의 조상이 나왔다며 동굴생활의 흔적을 말하는 학자도 있지만, 신화이지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다. 제주 삼성신화는 조선 문종 원년(1451)에 편찬된 에 나와 있으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와 이 있다. 이영권님의 에 나온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탐라현은 전라도 남쪽 바다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한라산의 북녘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곳이 그것이다. 맏이를 양을나라 하고, 다음을..

영월 호야지리박물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가면 호야지리박물관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지리를 가르치셨던 호야 양재룡선생님이 사재를 들여 만드신 박물관이다. 지리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야 선생님은 '재미있는 지리', '함께하는 지리'를 표방하고 있다. 지리와 후배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혼이 녹아있는 듯 하다. 호야지리박물관에는 고지도, 지구본, 지리관련서적, 각종 지형모형, 화석, 광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월에는 많은 박물관이 있으며, 주변에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아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이다. 근대기의 지리관련 서적 (사진출처:호야지리박물관)

정업원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번지에 위치한 정업원은 고려시대에 비구니스님(여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태종 때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없어졌다가, 세조 때 다시 건립되었다. 연산군 때 비구니스님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으며, 명종 때 다시 복구되었다가 선조 때 지어졌다. 정업원의 위치가 현재 청룡사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근거로 영조 47년(1771)에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청령포로 유배간 후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는 동망비와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가 쓰여진 것을 보고 추정하는 것이다. 순조 23년(1823)에 화재로 불타버린 정업원에 청룡사를 지어졌으며, 현재의 대웅전은 1973년에 중창하였다. 정순왕후 송씨는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이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스럽다고 ..

안성 로스가든카페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미산저수지 앞에 1970,80년대 멜로배우인 노주현씨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미산저수지와 어울려 코로나와 무더위에 제 블로그를 찾으시는 분들께 힐링을 드리려고 올립니다. 가격은 비싼 편이네요. 텔레비젼에 비친 멋진 것을 상상하고 갔는데 물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끼고 왔습니다. 로스가든카페 미산저수지 모습 아메리카노커피잔의 컵홀더(노주현씨와 함께 커피를...)

한양도성과 서울기상관측소

삼성강북병원을 지나 홍난파가옥을 지나면 흰색 건물이 보인다. 바로 서울기상관측소이다. 1998년 방배동으로 기상청이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요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된 것은 1883년 9월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압, 기온, 풍향 등을 3시간마다 측정하였다. 1895년에 일본에 의해 인천에 근대적인 기상관측소가 세워졌다. 서울에는 1907년 10월 1일에 정동에 세워진 경성측후소가 관측의 시작이다. 1932년 11월 10일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1번지에 중앙기상대가 만들어졌다. 준공에 맞추어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자. 경성의 저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고, 저 구름에 비가 싸여 온다. 래일은 맑고 치웁다. 그날 그날의 창공과 싸우고 긔압과 더..

한양도성 소의문

서소문(西小門)인 소의문(昭義門)은 한양도성의 숭례문과 돈의문 중간 쯤에 위치한 문이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문은 1914년 일제에 철거되어 현재는 중앙일보사 축대 옆에 홀로 표지석만 남아있다. 소의문은 태조 5년(1396)에 9월 24일 완공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태조 3년(1394) 2월 12일 서소문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 보내고 사흘 뒤에는 석장이었던 중을 효수하여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문루를 8월에 완성하게 하였다. 소의문은 소덕문(昭德門)이라 불리웠는데, 성종 3년(1472)에 예종의 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하면서 피휘(避諱)하기 위해 소의문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은 ..

한양도성 광희문

남산에서 국립극장을 거쳐 장충체육관을 지나 성곽을 따라가다보면 성문이 나타난다. 바로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이다.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조선시대에 서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 문을 통해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으로 운구했기 때문이다. 세조 2년(1456)에 서울 동남쪽인 장충동 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내고 광희문이라 하였다. 예종 원년(1469)에 음양설에 따라 기존의 문을 막고 현재의 자리에 새로 수구문을 내면서 남소문의 현판인 광희문을 갖다가 새 문에 달았다. 에 숙종 37년(1711)조에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가 없어서 후에 다시 공사를 하기로 했다’ 는 기록이 보인다. 김지하의 시 「녹두꽃」..

최순우 옛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5길 9에 위치한 최순우 옛집(해곡최순우기념관)은 의 저자로 유명한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돌아가신 1984년까지 사셨던 곳이다.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보존하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해 보존되었고,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기금이 발족되면서 우리나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최순우 선생은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셨다. 평생 박물관 전시, 유물 수집과 조사, 연구와 교육, 홍보, 후진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셨다. 우리 문화에 대한 글 6백여 편은 돌아가신 뒤 (1~5), , 의 저서을 남기셨다. 자연과의 조화가 아름다운 집이다.

한양도성의 낙산과 암문

낙산(駱山)은 낙타산(駱駝山)이라 불리는데, 산의 생김새가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낙산은 태조 3년(1395)에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네 산 가운데 하나가 됐다. 동쪽 경계인 낙산의 능선을 따라 혜화문(동소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성벽을 쌓아 한성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암문(暗門)은 성문 중 하나이지만, 일반 성문과는 달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아 감추어진 곳에 성의 출입을 하게끔 되어 있다. 이곳은 유사시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통로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암문을 통해 한성대 주변이 보인다. 흥인지문으로 이어진 성곽과 여장(아래)

수원 화성 화서문

정조 20년(1796)에 만들어진 화성의 서문이다.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는 석축 부분에 홍예문을 열고 그 위에 창룡문처럼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문 앞으로 벽돌로 쌓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이익공 형태로 외목도리로 받쳤다. 익공계지붕에서 주로 쓰는 창방 위에는 화반을 배치하여 중량을 분산하는 형태로 다른 성곽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보물 제 403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화서문 가까이 서북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알기 위한 망루인 돈대이다. 벽돌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원거리와 근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총구가 있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