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427

아픈 역사, 경희궁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경희궁, 그중에 황학정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9길 15-32에 있는 황학정은 원래 광무 3년(1899) 고종황제의 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 담장 가까이에 활쏘기를 연습하도록 만든 활터이다. 고종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단련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려는 뜻으로 (하지만 총을 가진 일본에 대항하는 것은 요즈음 흔히 죽창가를 부르짖는 무리와 같다고 할까?) 활쏘기를 장려하기 위해 어명으로 궁궐 안에 만든 것이다. 궁궐 안이지만 백성들에게도 개방하였으며, 고종도 자주 방문한 모양이다.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 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팔릴 때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대한제국..

조선 왕릉, 원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의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난간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세련되고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망주석은 오른쪽은 세호가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은 세호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상, 중, 하대석 부분이 꽃무늬로 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 때부터 중계와 하계가 합쳐지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을 함께 배치했다. 이곳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다. 그러나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문제점으로 현종 14년(1673)에 천릉하고난 후 영조가 묻혔다. 원래 영조는 첫..

경복궁의 복원된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이 복원되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향원정을 2018년 11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제 경복궁에서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창덕궁의 부용지보다는 크고 경회루의 연지보다는 작지만 북악산과 어울린 연못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지은 건청궁 앞에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여 임진왜란 이후 습지로 있던 곳에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으며 섬 안에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2층의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는 멀수록 더욱 밝다’라는 뜻의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정’은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가 쓴 이라는 글에 ‘향원익청(香遠益靑)’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연못에서 향원정을 갈 때 ‘향기에 취한다’는 뜻..

조선 왕릉, 헌릉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은 제3대 태종(1367~ 1422)과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능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방원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종 즉위의 1등 공신인 하륜은 방원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 라고 칭찬했다.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마저도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공양왕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게 하였다. 의안대군(방석)이 세자가 되자, 태조 7년(1398)에 건국 공신인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방석과 방번은 귀양가는 중에 살해하였..

조선 왕릉, 온릉

온릉은 중종의 첫 번재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릉이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에 있는 단릉(單陵)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박원종 등이 반정을 도모하면서 신수근의 협조를 받으려고 했으나, 누이가 있기에 협조하지 않았으므로 중종이 즉위하고 왕비로 책봉된 후 7일만에 폐위되었다. 경회루에서 중종이 신씨를 잊지못하여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았다. 이 소식에 신씨는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았기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더나자 폐비 신씨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명종 12년(1557)에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친정 집안..

조선 왕릉, 파주 장릉

장릉은 세 곳이 있다. 어제 언급한 김포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후에 추존된 원종)과 구씨부인(후에 인헌왕후로 추존)이 합장된 릉이고, 파주에는 원종과 인헌왕후의 아들인 인조의 릉인 장릉이며 영월은 단종 릉이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파주 장릉은 제16대 인조(1595~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씨의 무덤으로 17세기와 18세기가 공존하는 양식의 왕릉이다. 인조는 임진왜란 중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원종)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선조의 첫 손자였기에 왕궁으로 불러들여 기르며 아꼈고, 의인왕후 박씨도 아꼈다고 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는 서인들이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와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임에 대한 부도덕성을 비판하며 일으킨 반정에 의하여 임금이 되었..

조선 왕릉, 김포 장릉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릉이 있다. 바로 김포 장릉이다. 인천시가 건설하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왕릉의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고 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애써서 마련한 아파트를 어떻게 할지 난감한 지경일 것이다. 이 왕릉은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으로 제16대 인조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어머니 인헌왕후(1578~1626) 구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신중한 성격과 효성이 남달랐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가까이서 호종하였기에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정원군을 견제하였다. 특히 정원군이 살던 곳으로 집터에서 ..

개천절

어제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나라에서 공식 지정한 국경일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이 땅에 나라를 새로 연 날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는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새로 연 날은 음력 10월 3일이다. 하지만 1949년부터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 어렵다고 하여 양력 10월 3일로 정해놓고 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의 규모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왕이 직접 개천절 행사에 참가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나, 오늘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이나 태백산의 천제단은 대종교나 지역 행사에 그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개천절 행사를 하는 제단은 대개 위는 둥글고 아랫부분은 네모진 모양이다. 태백산에 있는 천제단은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

아픈 역사 경희궁

경희궁의 정전은 숭정전이다. 일제는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훼손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나갔다. 이것을 일본 사찰인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서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해방 이후 다른 건물은 없어지고 숭정전만 남았으며, 그 땅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서서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법당으로 사용되면서 '동국대 정각원'이 되었다. 용의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七爪龍)'의 모습이다. 그런데 황제일 때는 오조룡이며, 제후국이었던 조선은 사조룡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을 제압할 수 있는 흑룡에다가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을 경희궁 숭정전에 설치한 것은 그의 중립외교를 통한 자주 국가의 신념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경희궁의 아픈 역사가 아닐..

현충사 십경도

현충사 사당에 있는 십경도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그린 그림이다. 부산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왜군들의 서해 진출로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서해진출로의 봉쇄는 왜군의 보급로 차단을 가져옴으로써 왜군으로서는 곤경에 처하고 점차 전쟁이 조선에 유리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해군참모총장)이 되어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