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427

현충사 십경도

아산시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있는 현충사, 이순신 장군이 방씨와 혼인하면서 살던 옛집과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곳.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10년간 무예를 연마하여 32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숙종 32년(1706)에 이순신 장군 순국 108년이 지난 후 사당이 건립되었다. 숙종 33년(1707)에 숙종이 '현충사(顯忠祠)'의 사액을 내렸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32년 동아일보가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사당을 다시 세웠다.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 사업을 실시했으며, 2008년부터 11년까지 유적정비사업을 통해 충무공기념관이 세워졌다. 사당인 현충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이 담긴 십경도가 있다. 정창섭,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십경도 중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전반전에..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의 사방석불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사방석불'이 있다.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낟. 동서남북 사면에 모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네 불상의 형식과 크기가 일정하면 사방불, 일정하지 않으면 사면석불이라고 한다. 1983년 화전리 미륵당에서 발견되었으며, 서산마애삼존불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불이고, 백제 유일의 사방불이다. 하지만 사방불의 불상들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아 문화적 가치가 높음에도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면에 있는 석가불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불두'와 '두광'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면의 약사불로 사람의 크기와 같게 제작된 등신불이다. 서산마애삼존불과 자연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 비슷하다. 서면의 아미타불로 발견 당시..

경복궁을 파괴한 일본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하고난 후 경복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바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박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5년의 조선 물산 공진회와 1923년의 조선 부업품 전시회, 1929년의 조선 박람회였다. 일제는 임금이 앉아 신하들의 인사를 받던 근정전에 단상을 설치하고 개회식과 시상식을 개최하였다. 1915년 개최된 한국 최초의 본격적 박람회인 '조선 물산 공진회'는 일본이 식민지가 된 뒤 5년 만에 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우리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9월11일부터 50일 개최된 박람회로 경복궁의 여러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한반도의 주인이 일본이라는 것을 조선인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1915년에 경복궁을 훼손하면서 개최했던 조선물산공진회장에 대한..

군위군 법주사의 왕맷돌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에 법주사라는 사찰이 있다. 법주사하면 충청북도 보은의 사찰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곳의 사찰에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2호 “군위법주사왕맷돌 (軍威法住寺왕맷돌)”이 있다. 원래 법주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심지왕사가 창건했을 당시만 해도 규모가 큰 사찰이었으나, 조선 인조 원년에 불에 탄 것을 현종 원년(1660)에 다시 지은 전통사찰이다. 현재 중심 건물인 보광명전은 숙종 16년(1690)에 다시 지은 것으로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건축물이다. 법주사의 명물은 왕맷돌이다. 지금 115cm, 두께 15.5cm의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맷돌은 2개의 돌을 포개어 놓고, 위에 있는 돌을 회전시켜 각종 곡식을 갈게 하는 도구이다. 윗돌에는 곡물..

경북 칠곡군 가장 큰 선돌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주로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신성한 지역을 표시할 때, 그리고 조상신을 숭배하거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세워진 거석(巨石) 문화재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선돌 중 가장 큰 것이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로 5-7에 가면 경북기념물 제29호인 신동 입석(立石)이 있다. 입석의 동쪽을 개간할 때 무늬없는토기와 돌도끼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선돌은 높이 약4.5m 밑둘레 약 2m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입석가운데 가장 크다. (신안의 압해도에 있는 선돌은 높이가 4.8m이지만 밑둘레는 1m이다) 선돌의 남면에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여있다. 그런데 이 선돌의 중..

이천동요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박물관이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우선 장소가 협소하고, 전시된 유물의 양이 적은 편이다. 조금 더 많은 자료가 모아져야 하겠다. 그리고 요즈음 박물관의 흐름은 체험 공간이다. 이천동요박물관에도 체험공간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협소하다. 동요박물관은 어린이가 주로 관람을 할 것이다. 트롯이나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는 요즈음 아이들의 감성을 잡고 흥미를 붙이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악기나 동영상과 함께 재미있는 춤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이천동요박물관은

이천 동요박물관

이천 서희청소년문화센터 안에 동요박물관이 있다. 어릴 때 부르던 동요 생각이 저절로 나서 관람을 하였다. 우한 바이러스로 처음에는 관람이 어렵다고 했으나, 판교에서 왔다고 하니 협조를 해주었다. 관계자분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방정환선생부터 현재까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그러나 요즈음은 웬지 동요보다 대중가요가 아이들에게 더 익숙한 듯 하다. 얼마 전 끝난 트롯에서도 초등학생이 두 명이나 최종 7인에 들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겠지만, "동요를 불러 돈이 될까? 대중가요를 불러야 돈이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수한 분야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많이 있지만, 전시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천동요박물관은

진짜 동재기 나루터는?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과천 남태령을 넘어 사당, 그리고 동재기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동재기와 동작, 지금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동작동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국립현충원은 6.25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만들어졌다. 한강 인도교와 지하철 4호선의 개통으로 나루터는 흔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서초구와 동작구가 세운 동재기 나루터의 표지석이 각기 다른 위치에 있다. 두 자치단체가 공동 연구하여 한 곳에 세우면 지명 유래나 시민들의 탐방 행사에 도움을 줄 것 같은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동재기나루터는 개인이 운영하는 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면서 이곳을 관리하는 별장(別將)을 두었다. 철종대에는 내곡동에 있는 순조의 릉인 인릉을 참배하기 ..

제주도 관덕정

제주도에서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관덕정(觀德亭)은 세종 30년(1448)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후 성종 11년(1480)에 제주 목사 양찬이 수리한 고, 여러 차례 중수되었고, 1969년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 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평소 마음가짐과 덕을 쌓으라는 의미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으로 사방이 모두 개방되었다. 2중 기단위에 26개의 기둥을 세웠다. 호남 제일정으로 불릴만큼 규모가 크고,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제주 관아 밖에 있지만 관아의 일부이며, 일본에 의..

세검정(洗劍亭)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인 정자이다. 세검정이라는 이름은 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반정인사들인 이귀와 김류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면서 칼을 갈았던 곳' 이라고 하여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를 맹세한 후 창의문(紫霞門)을 뚫고 창덕궁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세운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 는 설도 전한다. 이 지역은 서울로 가는 목구멍에 해당하는 군사적 요지이기에 영조 때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겨 방어하면서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총융청의 군사들이 쉴 수 있게 만든 정자가 바로 세검정으로 당시 총융청 감관이던 김상채가 지은 에 영조 23년(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