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한양도성

한양도성 사대문

윤의사 2020. 1. 31. 20:26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한양도성을 건설하면서 4개의 대문과 4개의 작은문(소문:小門)을 만들었다.

한자에서 인(仁)은 동(東), 의(義)는 서(西), 예(禮)는 남(南), 지(智)는 북(北)의 방향을 가리킨다.

인의예지는 때로 책의 순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한강도성의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 했다.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지(智)가 아닌 정(靖)을 사용한 것은

‘외척이 나라 정치에 간섭을 막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편안하길 바란다’는

정도전의 뜻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흥인지문

한양도성이 건설될 때 만들어진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태조 5년(1396)에 처음 만들어지고, 단종 1년(1453)에,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각각 고쳐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1915년 일본이 서울에 전차를 설치하면서 허물려고 하다가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처음 한양도성을 통과한 문이라고 하여 살아난 문화재이다.
다른 사대문과 달리 흥인지문에는 성문을 둘러싼 옹성이 있다.

조선시대 풍수에 의하면 동쪽이 기운이 약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동쪽으로 외적들이 침입하기 쉽다고 생각하여 기운을 세게 하기 위하여 옹성을 쌓았다.

또한 다른 사대문이 세 글자인데 비하여 흥인지문이 네 글자 정사각형 현판으로 된 것은

낮아 물이 흘러가 기운을 빼앗기므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2018년에 흥인지문도 방화로 불에 타는 것을 겨우 진화하여 담벼락만 조금 그슬렸다.

하마터면 숭례문과 같이 문화재가 영원히 사라질 뻔 했다.

 

 

동묘쪽에서 바라본 흥인지문(옹성과 정사각형의 현판이 보인다)

 

 

 

돈의문

돈의문은 서대문으로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대문의 위치는 경향신문 앞 정동 사거리였다고 한다. 원래 오늘날 독립문 근처에 있으면서 의주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했던 문인데 풍수의 영향, 또는 당시 권력자였던 이숙번의 영향으로 문이 옮겨졌다가 정동사거리에 세종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동 사거리부터 세종로까지를 새문안길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풍수학생인 최양선이 돈의문이 궁궐의 팔과 다리 역할인데 이를 사람과 말이 다녀서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라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서전문을 세웠다가 세종대왕 때 정동사거리에 돈의문을 세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문(新門)’이라거나, ‘새문’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곳을 ‘신문로’, 또는 ‘새문안길’이라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태종이 임금이 되는데 큰 공을 세워 힘이 막강했던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앞에 있었다. 자신의 집 앞으로 사람들이 다니므로 시끄러우니까 문을 막아버렸다. 한자로 ‘색문(塞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하여 새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문을 옮길 정도로 오만하면서 사치스러웠던 이숙번은 결국 태종의 미움을 사서 태종 17년(1417)에 경상도 함양으로 귀양을 갔다. 겸손해야하는 것을 잊으면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돈의문은 숙종 때 다시 지으면서 유지되다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1915년에 전차를 건설하면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철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왜놈이 처음 한양성에 들어온 문이라 해서 문 옆으로 건설했지만, 돈의문은 목재와 기와가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경매로 팔렸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끼친 해가 얼마나 큰 지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사진으로 본 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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