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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의 날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금속활자(상정고금예문1234년/직지심체요절1377), 측우기(1441),현대에 들어서서 1967년 이태리 타월, 1976년 커피믹스, 1998년 밀폐용기를 들 수 있다.그중 최고의 발명품은 금속활자 인쇄술과 우량을 관측하는 것이 아닐까?특히 우량을 관측하는 측우기의 발멸을 기념해 만들어진 기념일이 바로 '발명의 날'이므로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이전까지 비가 오면 물리 스며든 정도를 가지고 강우량을 측정하기에 가물거나 장마 때면 정확한 강우의 측정이 어려웠다.이런 까닭으로 홍수나 가뭄에 대비하기가 어려웠기에 세종대왕이 명령을 내려 당시 세자였던 향(후에 문종)이고안하고 장영실 등이 제작한 발명품이다. 국가단위로 표준화된 기상측정기구로 세계최초이며, 이탈리아 카스틸..

상하이 주가각(朱家角)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수향(水鄕)으로 '상하이의 베니스' 라고 불리는 주가각은송원[宋元] 시대부터 유명한 마을로, 각리[角里]라고도 불렸다.각리는 외곽, 변두리 지역을 뜻한다.그러므로 주가각은 주(朱)씨가 모여사는 변두리, 외곽이라 하겠다.수나라 양제는 남쪽의 물산을 화북지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북경에서 항주까지 무려 1,700여 km 운하를 건설하였다.기존의 강들을 연결하는 운하였다.그리고 운하 양안에는 벼드나무를 심었다.운하를 따라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는 장관일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수양제가 심은 버드나무라 하여 '수양버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주가각도 운하로 만들어진 곳으로 수심은 2m 내외라 한다.일선가(一线街)라 불리는 동쪽 팡성챠오에서 서쪽 미주농까지 약 1km가 물위의 도시라고 불리울만큼..

중국 2024.05.18

이 인간은 도대체 ...

文 회고록 “김정은, 나도 딸 있는데 핵 머리에 이고 살게 하고 싶지 않다 말해”|동아일보 (donga.com) 文 회고록 “김정은, 나도 딸 있는데 핵 머리에 이고 살게 하고 싶지 않다 말해”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미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던 2018년 종전선언의 대가로 핵 신고 리스트를 요구한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의 요구에 “제대로 사귀어보기도 전에…www.donga.com文 "아내 인도 간 건 첫 영부인 단독외교, 지금 영부인은…" [文 회고록] | 중앙일보 (joongang.co.kr) 문 전 대통령 "아내 인도 간 건 첫 영부인 단독외교, 지금 영부인은…" | 중앙일보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윤 정부를 비판했다.www.joongang.co.kr文 "한·미훈련 중단, 美 싱..

상하이사범대 위안부 역사 박물관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로 나갔던 분들의 가슴아픈 사연이 안타까움을 더해가고 있다.중국도 마찬가지이다.상하이에 있는 상하이사범대 원위안루 2층에  있는 위안부역사박물관은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중국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박물관으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입증하는 각종 사료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긴 유물, 대일 배상 요구 활동 관련 자료, 학술연구 성과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193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이후 중국 내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위안부가 운영되었다.1938년 1월 13일, 상하이에 일본군이 직영하는 대형 위안소인 '양가택 위안소'가 세워졌다.일본군은 전쟁이 확대되자 길림, 요녕, 내몽고, 산서, 하남, 하북, 강소 등 중국 전역에 대량의 위안소를 설치했다.상..

중국 2024.05.16

송경령 묘원

중국근대사를 뒤흔든 송씨 세자매가 있다. 1녀 송애령은 돈을 사랑한 여인, 2녀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한 여인, 3녀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다.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손문(쑨원)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쑹칭링) , 장개석(장졔스)과 결혼한 셋째 송미령의 세 자매를 두고서 흔히 하는 말이다.첫째 송애령은 공상희는  공자의 직계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무부장이 된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조국을 사랑했다는 둘째 송경령(1892~1981년)은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인지 1981년 10월에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명예주석 송경령 동지'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부여했고,  중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송경령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민주..

중국 2024.05.15

'쉰들러 리스트'보다도 앞서서 인명을 구한 '미니 보트린'

독일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유태인 학살에서 유태인을 보호하고 구한 쉰들러리스트보다도 앞서서 ‘미니 보트린’ (Minnie Vautrin)은 1937년 난징에서 일본군 관동군에 의한 대학살이 있을 때  중국의 여성들을 구하고, 난징 대학살을 세상에 알린 선교사이다.미국의 일리노이주에서 1886년 9월 27일에 태어난 미니 보틀린의 본명은 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이지만 ‘미니 보트린’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어린 시절부터 대학 진학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리노이대학교 아바나-샴페인에서 공부하였다.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선교사 겸 선생님으로 중국으로 갔다. 중국의 안휘성에 있는 Luchowfu 주에 여학교를 세우는데 기여했고, ..

만국공묘가 있는 송경령 묘원

상해시 장녕구 송원로 21호 송경령능원에 위치한 만국공묘는 1910년-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어있는 공동묘지였다. 만국공묘로 이장되기 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의 묘는 '징안스루(靜安寺路)'에 있었다. 1966년-197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상하이의 도시 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정안사로'가 철거된 후 한인독립운동가 등 외국인 묘 가운데 일부가 이곳에 이장되었다.이곳에 있던 애국지사의 묘들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점진적으로 우리나라로 봉환되었다.1993년 8월 5일 노백린, 박은식,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등 5기가, 1995년 6월 21일 윤현진, 오영선 2기가 봉환되었다.박은식 선생(1859 ~ 1925)은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중국 2024.05.12

상하이 영안백화점

남경로(南京路)에 위치한 영국인이 세운 영안공사 소유의 이 건물은 1918년 상하이 최초로 문을 연 6층짜리 영안백화점으로 지금도 고전 양식 그대로 건물이 보존되어 있으면서 내부만 리모델링을 통해 백화점 영업을 하고 있다.당시에는 부속시설로 여관, 음식점, 놀이동산을 갖추고 있었다. 이날의 모임은 당시 농림장관이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안창호 선생이 많이 이용하던 여관 '대동여사'가 있었다. 백화점 내 대채루라는 음식점에서 1921년 1월 1일 59명의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신년 모임을 연 뒤  모임을 마치고 옥상에 올라와 기념촬영을 했지만, 촬영했던 장소가 영안백화점 옥상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인 19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KBS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중국 2024.05.11

어버이날

‘어버이 날’의 유래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영국과 그리스에서는 사순절의 첫날부터 넷째 주 일요일에 부모님께 감사하기 위해 교회를 찾았던 풍습에서 유래가 되었다. 또 다른 유래는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여성의 미담을 전해들은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1914년에 5월의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면서부터 정식 기념일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어머니가 살아계신 사람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면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각종 모임를 열며, 가정에서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 재청별장

1932년 여름, 일제는 상해-항주 철도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해, 가흥 거리에는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이 김구 선생을 찾기 위해 오갔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에게도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던 김구 선생은 주푸청 며느리(주자루이) 친정 소유인 재청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도 안된 주자루이가 하이옌의 피난처로 안내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7, 8월 염천(炎天)에 친정의 여노비 한명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서남산령 고개를 넘는 모습을 보며 김구 선생은 감동했다.'고 에 적고 있다. 이어서 '우리 국가가 독립하게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으..

중국 202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