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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오늘의 역사, 서울 재탈환

1951년 오늘,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로 잃었던 서울을 약 2개월만에 재탈환하였다. 1.4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했고, 서울 탈환 후 3월 말에는 38도선까지 회복했다.사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백만대군이라고 하지만, 한국군이나 유엔군은 중공군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당시 중공군의 숫자는 30만명, 북한군의 숫자는 12만 합계 42만이었다.반면 한국군과 미군은 22만과 18만, 그리고 다른 국가의 군대(미군을 제외한 유엔군)이 2만으로 숫적으로 결코 밀리지 않았다.결국 정보전에서 미국과 유엔군은 패했던 것이다.더구나 중공군은 평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선을 방어선으로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유엔군의 후퇴로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했던 것이다.미 8군..

3월13일 오늘의 역사,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순국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부친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 사이의 3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김윤방이 지었고, 아버지는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다가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는 190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숙부 김필순의 도움으로 1906년 정신여학교를 다니며 김필순과 교유하던 노백린, 김규식 등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의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4년에 일본의 도쿄여자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민주당의 행태

[단독] 국회 대리인에 李 특보, 민변 회장…그들만의 ‘짭짤한 탄핵’ [단독] 국회 대리인에 李 특보, 민변 회장…그들만의 ‘짭짤한 탄핵’단독 국회 대리인에 李 특보, 민변 회장그들만의 짭짤한 탄핵 22대 국회 들어 야당이 강행한 탄핵 9건 분석www.chosun.com[속보] 헌재, 전원일치로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 기각 [속보] 헌재, 전원일치로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 기각속보 헌재, 전원일치로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 기각www.chosun.com과연 민주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지 의문이 든다.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활동하는 듯 하다.이제 탄핵이 기각된다면 과오를 저지른 것이니 탄핵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에게 변호사비를 부담시켜야 한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권을 위해 한 짓이기에 세금으로..

3월12일 오늘의 역사, 트루먼 독트린 발표

미국의 제 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3월 12일 미국 의회 상하 양원 합동특별회의에서 '그리스·터키 원조 법안' 승인을 위한 '트루먼 독트린' 이라는 새로운 외교 노선을 공표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내, 외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양국에 군사 원조를 실시하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이다.이 트루먼 독트린은 전임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소련에 유화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과는 상반된 것이다.트루먼이 강조한 것은 "무장한 소수 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국가 국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2차대전 중 연합국의 일원으로 함께 싸웠던 미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를 끊..

3월11일 오늘의 역사, '자유부인' 작가 정비석이 자신의 소설 비난문에 반박

1954년 정비석 서울신문에 8월 6일까지 연재한 소설이다.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서울신문의 판매부수가 세배로 급격히 증가하였다.정비석의 대표작으로 전쟁 이후 달라진 사회상을 현실적으로 그리면서 풍자하고 있다. 대학 교수 장태연과 그의 아내 오선영이 주요 등장인물이다.오선영은 명사 부인들의 모임인 화교회를 통해 다른 세계를 접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오선영은 친구의 소개로 이월선의 양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처음 집을 나선 오선영은 사교춤에 관심을 갖고 남편 제자인 신춘호와 춤을 추며 외도를 시작한다.장태연은 미군 부대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타자수 박은미에게 관심을 가지며, 집에서는 '박은미'라는 낙서를 하면서 호감을 갖게된다. 하지만 박은미가 결혼하면서 마음을 정리하였다.오선영과 썸씽..

3월9일 오늘의 역사, 국민총생산액 발표

1965년 3월 9일, 1964년 1인당 국민 총생산액이 99달러 90센트로 발표되었다.다른 나라의 경제 수치에 한참 모자라는 최빈국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먹는 장충동 족발이 왜 유명할까?바로 장충체육관에서 했던 레슬링과 권투를 보고난 후 이기면 이긴대로 좋고, 지면 스트레스 푼다고 해서 소주나 막걸리한잔에 먹던 것이 바로 장충동 족발이다.경기가 열리던 장충체육관을 짓는데 도움을 준 나라가 있다.바로 필리핀이다.당시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잘살아 1인당  국민 총생산액이 300달러였다.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147여 개의 국가가 독립하였다. 2024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I는  3만6천624달러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만 비교하면 우리나라보다 1인당 ..

나라의 조의금과 장례용품을 거절하라고 유언을 남긴 이황

조선 명종 때 사상가, 유학자성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동방의 주자’로 불렸다. 이황은 사립 학교를 세워 제자를 기르는 데도 힘썼으며, 그의 학설은 일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은 책으로는 퇴계 전서> 등이 있고, 시조로는 ‘도산십이곡’이 있다. 어릴 때 이름은 서흥, 자는 경호,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시인, 시호는 문순이다. 이황은 일찍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식들을 글방에 보내고, 늘 몸가짐과 말을 삼가도록 가르쳤다.이황은 혼자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하기를 즐겼는데,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공부하다 건강을 해쳐 평생 잔병치레가 심했다고 한다.비교적 늦게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당파 싸움 속에서도 흔들림..

3월5일 오늘의 역사. 북한에서 토지개혁법 공포

​1946년 3월 5일은 북한의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토지개혁법'을 공포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해방이 이루어져 평등사회가 되었지만, 실제적으로 평등사회가 되는 것은 토지개혁 이후라 하겠다.1945년 38도선 이남의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70%였으며, 총 경작지의 63.4%는 생산량의 50~60%을 내는 도조를 실시하는 소작농들이었다. ​토지개혁의 시작을 북한이 시작했다. 1946년 3월 5일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는 농토를 '무상으로 몰수해 무상으로 배분'했다. 흔히 남북분당의 책임을 이승만 전대통령에게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이미 북한의 소련과 김일성은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정부 역할을 하며 38도선 이북을 다스리면서 겉으로..

3월4일 오늘의 역사, 제주도 우도 간첩침투

1973년 3월 4일 새벽 제주도 동쪽 3.5km해상에 있는 우도에 무장간첩이 침투해 해조를 말리는 건조장을 경비하는 민간인을 사살하고 도주했다.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3월 4일 0시30분쯤 우도에 나타난 무장간첩들은 해조를 말리는 건조장을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암호와 '동무'라는 말을 하는데, 경비원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5m거리에서 사살했다고 한다. 죄 없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을 만든 것이다.우도처럼 작은 섬에도 고정간첩이 있어 많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고 희생시킨 사람들이 바로 북한 김일성 일가이다.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위해 김정은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어서 정신을 차려 김정은 정권을 타도하는데 앞장서주기를 바랄 뿐이다.당시 부근 바닷가에서..

3월3일 오늘의 역사, 대조선독립단 창설

1919년 3월 3일은 박용만(1881~1928)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독립단'이 창립하였다.박용만은 안창호, 이승만과 함께 일제강점기 재미 한인사회를 이끌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박용만은 고종 18년(1881) 윤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관립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유학 시절 만난 박영효와 활빈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01년 3월 안국선, 오인영 등과 귀국하면서 체포돼 옥고를 치르던 중 중국에서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영향으로 한국의 량치차오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04년 '일본에 의한 황무지 개간 추진에 반대하는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