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3월 14일 오늘의 역사, 서울 재탈환

윤의사 2025. 3. 14. 13:46

1951년 오늘,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로 잃었던 서울을 약 2개월만에 재탈환하였다.

1.4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했고, 서울 탈환 후 3월 말에는 38도선까지

회복했다.

사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백만대군이라고 하지만, 한국군이나 유엔군은 중공군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당시 중공군의 숫자는 30만명, 북한군의 숫자는 12만 합계 42만이었다.

반면 한국군과 미군은 22만과 18만, 그리고 다른 국가의 군대(미군을 제외한 유엔군)이 2만으로 숫적으로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결국 정보전에서 미국과 유엔군은 패했던 것이다.

더구나 중공군은 평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선을 방어선으로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유엔군의 후퇴로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했던 것이다.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울프하운드'작전을 전개하면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중공군의 보급수준이 열악해 더 이상 유엔군을 추격할 수 없음을 알고 공세를 강화해 2월 14일 노량진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머뭇거렸다. 중공군의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성급한 작전은 화가 초래한다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이미 중공군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리지웨이는 머뭇거렸던 것이다.

3월 14일 한강을 건넌 1사단 정찰대는 적들이 서울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깨닫고 서울을 재탈환하게 되었다.

서울을 재탈환한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은 북한에 휴전을 제의했다.

이때 북한과 소련이 유엔군의 제의에 응했다면 비무장지대는 지금의 38도선 부근이 아닌 북한산 일대가 될 뻔하였다.

우리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인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좀더 북족으로 진군해야한다는 생각으로 38도선 일대가지 진군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서울 재탈환이 휴전선을 북쪽으로 끌어올렸다고 하겠다.

미군과 유엔군이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북쪽 국경선이 통일신라처럼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확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움이 크다. 

전선을 시찰 중인 맥아더 유엔사령군과 리지웨이 8군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