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3월13일 오늘의 역사,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순국

윤의사 2025. 3. 13. 15:59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부친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 사이의 3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김윤방이 지었고, 아버지는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다가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는 190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숙부 김필순의 도움으로 1906년 정신여학교를 다니며 김필순과 교유하던 노백린, 김규식 등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의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4년에 일본의 도쿄여자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2.8독립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허리띠(오비)에 2.8 독립 선언문을 숨기며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돼 고문(한쪽 가슴과 국부를 인두로 지지는 혹독한 성고문)으로 평생 후유증을 겪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결혼을 못했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 여성들의 연대와 참여를 이끌어내다가 체포됐지만, 끔찍한 고문에도 비밀을 말하지 않을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가 도와줘 중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공부했다. 도중에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에 실망하고 1923년 미국으로 가서 파크대학교와 시카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박인덕, 황애덕 등과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33년 귀국했으나 일경의 감시로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다른 한편으로 근우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교육과 계몽을 통해 여성의 권익 신장과 민족 해방을 위해 활동했다.

1938년을 전후하여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교회가 나타나고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던 시기였지만 끝까지 일본에 협조하지 않다가,  1943년 고문으로 얻은 병(상악골 축농증)으로 원산의 사택에서 정신을 잃고 1944년 3월 13일 결국 평양 기독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1962년 정부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