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8월 1일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군대 해산으로 군복을 벗은 후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반도에 선전 전단을 뿌리기 위해 비행기 조종사 양성에 관심을 가졌다.
1915년 7월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노백린은 하와이 미국 사령관의 묵인하에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이승만, 안창호의 관심 속에 노백린 장군은 공군이 장래 전투에서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해 1920년 2월 20일 미국 본토 윌로우스(Willows)에 '쌀의 왕' 김종림의 후원을 받아 한인비행사학교를 설립했다.
노백린은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Willows Daily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비행학교는 3.1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
고 호언하며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
고 말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비행기 2대를 구입하여 미국인 기술자 1명과 비행사 6명으로 교관단을 구성하고, 19명 생도로 교육을 시작했다.
개교해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비행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독립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교민들의 지원이 시들해져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문을 닫았다.
그후 노백린은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있다가 1924년 5월 30일 군무총장에 임명된 정통 군인이었다.
1925년 박은식 선생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자 국무총리가 되었다.
노백린은 1926년 1월 22일에 지병으로 망명지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 단칸방에서 순국했다.
병환 중임에도 “정복 입고 남대문에 입성”하고 싶다는 소원을 입버릇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노백린은 가족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기에 그의 아들 노태준 역시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치되었고, 차녀 노순경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공로를 인정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장군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치돼 있다가, 1993년 임정요인 유해 봉환 때 고국에 돌아와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장됐다.(사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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