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2월 22일 한성순보의 후신인 한성주보 제4호 15, 16쪽 두 면에 ‘덕상(德商) 세창양행(世昌洋行) 고백(告白)’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가 실렸다. 24줄짜리 순 한문 광고였다.
광고주 세창양행(世昌洋行)은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로 홍콩을 중심으로 중국의 상해와 천진, 일본의 고베(神戶), 그리고 인천에 지점을 설립(1884년)하고 동아시아에서 서구 물건을 팔던 무역상이었다.
광고는 회사에서 구입할 물건으로 쇠가죽, 호랑이가죽, 여우가죽 등과 사람 머리털, 호랑이 발톱 등을, 팔 물건으로 자명종 시계, 뮤직박스, 서양 천, 성냥, 염료 등을 소개하는 내용을 실었다. 지금처럼 사거나 팔 물건에 대한 사진이나 도안이 없는 글자중심의 정보제공을 위한 광고였다.
제목 ‘덕상(德商) 세창양행(世昌洋行) 고백(告白)’에서 '덕상'은 '독일 상인'이라는 뜻이며, '고백'은 광고의 중국식 표현이다.
세창양행은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쓰였던 '금계랍(키니네)'과 끝이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바늘로 유명세를 탔다.
특히 엄마들이 자신의 유두(乳頭)에 키니네 가루를 묻혀 쓴맛을 보게해서 어린 아이의 젖을 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세창양행은 일제 초기까지 영업을 하다가 1914년 일본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서울의 독일 총영사관과 함께 폐쇄되었다.
'광고'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정기적으로 광고를 게재한 첫 신문은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광고에 대한 선전 효과를 강조하며 현대적 의미의 광고단가를 정하기도 했다.
1899년 6월 1일자 국문판 독립신문을 보면 1단 28행 기준, 40원(1년), 24원(6개월), 5월(1개월), 1원 50전(1주), 50전(1회)으로 장기 게재시 요금을 우대해 할인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창양행의 광고는 1886년 7월 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게재됐고 한성주보는 개화문명에 앞장을 서서 그 사명을 다하다 누적된 적자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7일 2년 6개월 만에 폐간됐다. 이후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뒤부터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되기 시작, 1910년 국권피탈 후부터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간지가 발간될 때까지 10년간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가 유일한 우리말 신문으로 광고매체 역할을 했다.
1956년에는 HLKA 방송국에서 라디오에서 광고를 하였다. 처음에는 의약품, 담배, 라면 등 소비재를 단순하게 스폰서 멘트나 제품을 소개하는 형식이었다.
1962년에는 '동양맥주'광고를 HLKZ-TV에서 최초로 방영하였다.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 정부의 국가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전자제품•주류•화장품•자동차 등의 광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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