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23일 오늘의 역사, 애국지사 박동완 순국

윤의사 2025. 2. 23. 10:22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통훈대부 감목관을 지낸 박순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근곡(槿谷)이고, 필명으로 근곡생(槿谷生), 근생(槿生) 혹은 근(槿)이며 비교적 여유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5세까지 한학을 공부했으며,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배우며 근대학문을 익히다가 1911년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학하면서 개신교에 입문하였다.

1919년 1월경 신문을 통해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읽고, 이번 기회에 조선도 일제 통치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박희도를 통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게 됐다.
당초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자칫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3월 1일 그는 태화관에서 이필주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일제 관헌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은 한층 더 나은 동양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 주여야 할 것'이라고 만세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재판에서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 4일 오전 풀려났다.

출옥 후 이전부터 활동하던 <기독신보>로 들어갔다.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으로 만들어진 당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기관였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절 언론을 장악한 일본의 영향 밖에서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민족 언론이었다. 

1924년 7월 기독교 월간지 <신생명(新生命)>의 주간으로 옮겨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신생명>이 폐간되자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의 집에서 흥업구락부를 결성했다. 

흥업구락부 활동과 함께 신간회에 들어가 총무간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신간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며 안재홍이 수감되는 등 민족진영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자 1928년 8월 하와이 지역 한인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하와이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현지 한인 사회의 교육과 문화발전에 힘쓰며, 교포 2세들에게 "의로운 청년이 되라'면서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한인기독교보>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하여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였다.
1941년 2월 23일 미국에서 사망 후 1개월이 지나 고국으로 돌아온 유해는 함태영 목사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5월 현재의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