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2

오늘은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이 태어난 날

임진왜란 때 바다의 명장 이순신과 더불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육지의 명장이다. 뛰어난 지략과 꺾이지 않는 구국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이끌며 행주산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또는 모악, 시호는 충장이다. 권율은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이름 있고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편이었다. 그는 158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광주 목사로 있었다. 서울이 일본에 의해 함락된 뒤 방어사 곽영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맞붙었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머물면서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금산에서 왜장 고바야카가 이끄는 일본군을 크게 이기고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금산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권율은 계속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

오늘은 나석주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날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석주의 집안은 왕실 소유의 궁장토를 경작하다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땅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었다. 일제가 지속적으로 소작료를 올리자 이를 항의하다가 소작토마저 빼앗겼다. 이후 황주군 겸이포로 이사하여 미곡상을 하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덕영과 함께 3월 10일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1월 김덕영 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만들어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구월산에서 친일파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고 친일 군수인 은율군수를 처단하였다. 일본의 포위망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자, 1920년..

오늘은 일제의 식량수탈인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졌다.

토지 조사 사업을 끝낸 일본은 한국을 부족한 일본의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는 산미 증식 계획을 펴나갔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일본은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업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쌀값이 갑자기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1933년까지 일본은 한반도에서 쌀의 생산보다 많은 식량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산미증식계획으로 많은 쌀을 수탈당한 곳은 주로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것이다.(사진출처:힐링) 대신 한민족에게는 만주에서 생산되는 보리나 콩 등의 잡곡을 수입하여 식량으로 대체하였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을 통해 군량미를 조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인천항의 약점인 조수간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중갑문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이천과 여주의 쌀을 군량미로 인천..

오늘 숙종 때 과거의 부정 방지 방법을 찾도록 하다

33권, 숙종 25년(1699) 12월 26일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태학(太學)은 본보기가 되는 곳인데 사습(士習)이 점차 투박하여지고, 과거(科擧)는 사람을 쓰는 근본인데 장옥(場屋)에 간사한 짓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 폐단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검토관(檢討官) 오명준이 청하기를, "대사성(大司成)을 특별히 구임(久任)시키고, 대비과(선조 이후 3년마다 실시되는 시험으로 식년시로 전시와 같은 것임) 이외에는 과거를 자주 설행하지 마소서." 하고, 참찬관(參贊官) 송정규는 아뢰기를, "문신(文臣) 가운데 글에 능하고 공정한 사람은 미리 초계하였다가, 과거에 임박하여 성상께서 낙점(落點)하여 내리소서. 차비관(差備官)도 지망(문벌과 명망)이 있..

오늘은 강남 개발의 시작인 한남대교가 개통된 날

한남대교(漢南大橋)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한강다리입니다. 한강에 최초로 다리가 만들어진 것은 한강철교이다. 1899년에 착공해 1900년 7월에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노량진을 연결하는 1,110m의 다리가 완성되었다. 한강대교는 최초의 인도교로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1917년 10월에 준공한 1,005m의 다리이다. 일제 총독부가 제1기 도로사업의 하나로 만들어진 교량으로 '제1한강교'라고 부른다. 노들섬(중지도)를 중심으로 노량진까지 대교와 한강로까지의 소교로 이루어져 있다. 충청과 강원지방에서 한강을 따라 올라오는 불산의 관문이었던 광나루(광진나루)는 1920년대만 하더라도 발동기선으로 화물차나 버스 등을 이동시키는 불편함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교통이 ..

오늘은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를 세운 날

기업가에서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을 발전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삼일운동 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 본명은 인환, 호는 남강이다. 이승훈은 가난한 시골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열 살 무렵부터 놋그릇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다. 20대에 이미 놋그릇 가게와 공장을 차릴 만큼 꽤 성공하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돈을 빌려 다시 가게와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1901년부터는 평양에 무역 회사를 세우는 한편 서울과 인천을 통해 외국과 거래를 하였다.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굽힌 이승훈은 이탈리아 사람과 연결하여 국제 무역 회사를 차려 한국 최초로 국..

오늘은 일본 전범 도조 히데키가 처형된 날

도조 히데키는 1884년 7월 30일 도쿄 부 고지마치에서 육군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임관하였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6년 황도파가 주도한 쿠테타가 실패한 이후 만주관동군사령관이 되면서부터이다. 쿠테타를 일으켰던 황도파 장교들을 체포하고 만주의 치안을 확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철저하게 진압하고, 이어진 중일전쟁에서는 관동군 참모장으로 직접 지휘를 하여 공을 세웠다. 1940년 육군대신이 된 도조는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 동맹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을 형성하는 삼국동맹 조약을 맺었다. 1941년 7월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 남부를 일본군이 점령하자, 미국은 인도차..

오늘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날

‘백제향로’라고 불리는 ‘백제금동대향로(百濟銅大香爐)' 또는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銅龍鳳逢來山香爐)'라고도 부른다.(국보 제287호) 1993년 사적 13호로 지정된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람객이 많다보니 주차장이 협소하였다. 이에 주차장을 확장하기 위한 사전 발굴 조사에서 절터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7세기 초에 제작된 향로가 발견되었다. 7세기 초라면 백제 무왕이 백제의 중흥을 위해 힘쓰던 시기였기에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였을 것이다. 향로는 전체 높이 64㎝, 최대 지름 19㎝이다. 2000년 전 한나라 때 만든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다. 봉황이 뚜껑 장식인 꼭지, 뚜껑. 몸통, 용받침 등 4부분으로 구성된다. 아름다운 연꽃잎에 둘러쌓인 몸통과 연꽃잎에는 두 신선과 날개가 달린 물고..

오늘은 24절기 중 동지

오늘은 동지이다. 동지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팥죽을 떠올린다. 팥죽의 빨간색이 귀신을 쫓아내기에 먹는다고 한다. 또 팥죽을 집 주변에 뿌려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또 하나 할 일은 입춘 때 문 밖에다 '입춘대길' 이니 '건양다경'과 같은 입춘첩을 내다 붙이는 것과 같이 동지 때는 팥죽으로 임금'왕'자를 거꾸로 써 놓으면 집에 좋은 일이 가득하고 나쁜 일이 오는 것을 막는다고도 한다. 그러면 팥죽에 왜 새알심을 넣어 먹을까? 흔히 동지를 '아세'라고 한다. '작은 설'이라는 뜻이다. 설날에 나이 먹었다는 뜻으로 떡국을 먹듯이 동지에는 자기 나이 수대로 새알심을 넣어 먹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부활을 뜻한다. 바로 남반구로 내려갔던 태양이 서서히 북반구로 ..

오늘은 경인고속국도와 경부고속국도(서울-수원)개통된 날

1968년 12월 2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경인고속국도와 경부고속국도 중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되었다. 고속국도의 개통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중심 사업이었다. 처음 고속국도를 건설한다고 했을 때 유명 정치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모든 차들을 줄세워봐야 경부고속국도를 못 채운다." "재정이 파탄날 것이다." "재벌들 골프치러가기위한 경부고속국도 건설 결사 반대" "머리보다 다리가 크고 양팔과 오른쪽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같은 건설" 등 갖은 비아냥과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공사 현장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설 도중에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아마도 건설에 대한 노하우와 장비 부족에 따른 안타까운 결과일 것이다. 그 분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건설된 고속국도는 국토의 대동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