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1

오늘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날(삼일천하로 끝난 미완의 혁명)

혁신정강 14개조는 신정부의 정치개혁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정부의 정강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간략히 규명해보면 이렇다. 첫째,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조공제도를 폐지한다고 밝힌 것은 조선의 자주권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당시 내정 간섭을 일삼는 청국 세력을 축출하고 자주국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하다. 둘째, 봉건적 신분 질서를 폐지하여 민중의 평등권을 실현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세째, 부패한 각종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상공업을 육성하여 자본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양반 중심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정치.사회 분야에 민주적 제도를 도입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정강에는 봉건적 국가 질서를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

오늘은 정철 시인이 태어난 날

정치인 정철이 1536년 12월 6일 정유침의 아들로 서울 장익동(오늘날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정치인으로 정철은 실패했다고 하겠다. 단지 서인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서인당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으로 가사(歌辭) 문학을 꽃피운 송강 정철은 윤선도와 함께 우리 나라 시문학에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대표작으로 가사엔 '관동별곡''사미인곡' 등이 있고, '이고진 저 늙은이...'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 '훈민가'도 남겼다. 송강의 가사로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과 시조 100여수는 국문시가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나타냈다고 하겠다. '사미인곡'은 선조 21년(1588) 정철이 지은 가사로, 5..

오늘은 국민교육헌장 선포일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됐다.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은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고, 많은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만 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해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로 끝나는 이 헌장을 누군가 의미를 가르쳐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따라 읽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 국민교육헌장의 비판자들은 이 헌장을 일제 시대의 '교육칙어'나 '황국신..

오늘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

12월 4일 오후 7시경, 전동(典洞)에 있는 우정국 연회장 안으로 각국 공사들과 수구파의 대표들인 민영익, 한규직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낙성식에는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낙성식이 있기 몇 시간 전인 4시쯤에 김옥균은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잠시 우정국에 들렀었다. 우정국에는 홍영식 등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홍영식은 일본공사 다케소에는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오지 못하고, 독일 영사도 병이 나서 못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수구파 핵심 인물들은 참석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윤태준은 야간 근무이기 때문에 궁내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옥균은 어차피 궁안으로 들어갈 것이니까 그리 걱정이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종 곁에 시중을 들고 있는 내시 변수(邊樹)가 일부러 고종이..

오늘은 조지훈 시인이 태어난 날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국문학자이다.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민족성을 살리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힘썼다. 올해는 조지훈 탄생 100주년이다. 조지훈은 꽃탑 소년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인 재능을 키우기 시작했고, 1939년 4월 에 '고풍의상'을 발표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는 전통적인 소재들을 세련된 시 속에 담아 어두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해방 이후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청년 문학가 협회를 만들어, 민족성을 살리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힘썼다.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데, 한국 현대시는 김소월, 김영랑에서 비롯되어 서정주,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로 이어진다. 이처럼 조지훈은 현대 시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으며, '승무', '풀잎 단..

오늘은 단기를 서기로 쓰기로 한 날

오늘날 서기를 사용하고 있다. 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서력기원 1년이라고 하여 올해가 예수의 탄생 2021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은 단기를 사용하였다. '단군기원'의 준말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이 서기전 2333년이다. 여기에 2021년을 더하면 단기가 된다. 즉 올해는 단기 4354년인 것이다. ​ 단기를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의 백문보였다. 열전 백문보조에 의하면 공민왕에게 글을 올려 하늘의 기수가 한번 돌면 다시 시작하여 700년이 한 소원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대주원이 되므로 정치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이다. 우리나라도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600년이라 이에 주년(周年)의 기회가 된다면 단군기원을 말하고 있다. 이후 1909년 나철에 의해 만들어진 대종교에서 단군기원..

오늘은 이황 선생이 태어난 날

기사를 보면 기가 막히다. 관료가 이러하니 국민들이 나라를 믿을 수 있을까?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국민과의 소통은 멀고도 먼 길인 것 같다. 정부에서 잘못한 일을 가지고 국민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국민과의 소통은 아래의 퇴계 일화를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소통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권철은 임진왜란 당시에 1등 공신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권율의 아버지이며, 어릴 적 이항복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손자 사위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권철이 이황의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안동을 왔다가 한서암을 찾은 것입니다. 이황과 권철은 나랏일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 국, 반 찬으로는..

오늘은 한국 최초 서양식 무용가 최승희가 출생한 날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에서 최준현의 딸로 태어난 한국 최초 서양식 무용가 최승희. 성적이 뛰어나 소학교 시절에는 2번이나 월반을 하고 1925년 숙명여중, 그리고 숙명여고를 거쳐 도쿄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연령이 적다는 이유로 불허되고나서 영화 제작자인 오빠 최승일의 영향으로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 입문하였다. 1927년부터 공연을 하기 시작하였고, 1929년에는 독자적으로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지며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을 공연하였다. 1931년 무용가 최승희는 안막과 결혼하였다. 안막은 이화, 김남천 등과 잡지 《집단》, 《군기》를 펴냈고, 일본 경찰은 국민들을 선동했다고 체포했다. 남편이 감옥에 있음에도..

오늘은 한국의 독립을 처음 언급한 카이로 회담이 개최된 날

대일본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협력 및 전후의 일본 영토 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카이로 회담이 1943년 11월 22일 열렸다. 루스벨트, 장제스, 처칠 등 연합국의 수뇌들이 카이로에 모인 것이다. 중국의 장제스는 1932년 4월에 일어난 윤봉길의사 의거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중국을 출발하기 전 김구 주석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장제스가 요구하여 선언문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는 한국이란 나라를 아는 나라도 거의 없었고 강대국들이 한국에 관심을 둘 때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노력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위한 최초의 국제선언이 있었다. 그 선언문에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 는 구..

오늘은 독립문의 주춧돌이 놓여진 날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독립문은 사적 제32호로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웠다. 건양 1년(1896) 독립협회 발의로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주춧돌을 놓는 의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들어졌으며,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하였다. 독립문은 대한제국 말에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며 독립 정신을 백성들에게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가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세운 것으로 교북동에 있던 것을 1978년 도시 계획으로 현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