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날(삼일천하로 끝난 미완의 혁명)

윤의사 2021. 12. 7. 09:24

혁신정강 14개조는 신정부의 정치개혁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정부의 정강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간략히 규명해보면 이렇다.

첫째,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조공제도를 폐지한다고 밝힌 것은 조선의 자주권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당시 내정 간섭을 일삼는 청국 세력을 축출하고 자주국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하다.

둘째, 봉건적 신분 질서를 폐지하여 민중의 평등권을 실현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세째, 부패한 각종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상공업을 육성하여 자본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양반 중심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정치.사회 분야에 민주적 제도를 도입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정강에는 봉건적 국가 질서를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부르조아적인 개혁 정치를 실행하겠다는 신정부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이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해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주제 등 고질적인 봉건적 병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신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세계사 발전 단계로 봤을 때 시대적인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혁명 세력은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천명한 뒤 내각을 구성하고 정강을 발표함으로써

외형상으로는 근대적인 신정부를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하였다.

신정부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군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김옥균은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날 청군 부대가 남의 나라 궐문을 닫지 못하게 한 무례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차후에 이러한 행동을 또 한다면 단호한 조치를 내리겠다

 

편지를 보낸 김옥균은 사관생도들을 각 영에 보내 녹슨 총칼을 정비하여 신식정예군대를 편성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럴 즈음 전날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며 일본군들에게 밤을 새워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다케소에가 갑자기 철군 의사를 밝혀왔다.

일본군이 궁내에 주둔하고 있으면 각국, 특히 청군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오늘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려 합니다.”

다케소에의 말에 김옥균은 매우 심기가 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군이 철수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는 다케소에에게 혁명군의 형편을 설명하면서 철군을 말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 군만 가지고도 방비가 가능하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십시요.

지금 각 영에 있는 총칼을 점검해보니 총은 녹슬어 탄약이 나가지 않고 칼날은 무디어서 마치 두껍기가 종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급히 총을 분해해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이런 마당에 공사의 군대가 철수한다면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3일만 기다린 뒤에 귀국 군사들이 철수한다면 차츰 나아질 것입니다. 그 후에는 우리 사관생도들이 군사들을 가르쳐 경비를 하게 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다케소에는 김옥균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김옥균은 내친김에 전에 얻지 못했던 차관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그러자 다케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김옥균은 자금 문제도 차츰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케소에의 태도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인지는 김옥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케소에는 사실 청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청군 1,500명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또한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본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것도 없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군의 출동은 늦어졌다. 왜냐하면 원세개와 오조유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즉시 무력 간섭을 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장하였고, 오조유, 진수당 등은 일본군이

조선 국왕을 호위하고 있으니 사태 추이를 봐서 결정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론은 원세개의 주장대로 하기로 하였지만,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김옥균이 일본군을 이용한 전략이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력으로 신정부를 몰아내겠다고 최종 결정한 청군은 마침내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고종이 대개혁 정치 실시의 조서를 내린 오후 3시경, 원세개는 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오조유는 500여 명을 동원하여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비원 일대를 포위하는 등 청군은 양동작전으로 혁명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나머지 군사 200여 명은 후위를 담당하였다.

원세개 군대의 공격을 받은 전.후영 조선 군사들은 무기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청군의 군사력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차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지만 일본군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해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3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 1천 명이 넘는 청군과 대응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도 김옥균 등은 끝까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물헌을 빠져나와 후원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무수한 총탄이 떨어지자 다시 후원 태극정 부근으로 고종을 피신시켰다.

고종은 더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대왕대비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고종마저 청군 수하에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혁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국왕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없이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은 고종을 데리고 빠져나가기로 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으로 가 거기서 일본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의 손에 살해당했으며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 7명은 간신히 일본행 선박을 얻어 타 일본 망명길에 오르고 말았다이렇게 해서 흔히 말하는 대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던 것이다.(민병덕의 <반역의 한국사>에서)

1885년 일본에서 찍은 갑신정변의 주역들, 좌로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1894년 중국 상해에서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어 본국으로 와서 양화진에서 거열형 후 효수된 김옥균, '대역부도옥균'의 천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