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나석주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날

윤의사 2021. 12. 28. 11:02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석주의 집안은 왕실 소유의 궁장토를 경작하다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땅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었다. 일제가 지속적으로 소작료를 올리자 이를 항의하다가 소작토마저 빼앗겼다.
이후 황주군 겸이포로 이사하여 미곡상을 하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1919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덕영과 함께 310일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1월 김덕영 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만들어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구월산에서 친일파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고 친일 군수인 은율군수를 처단하였다.

일본의 포위망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자, 1920년 9월 사리원에서 단신으로 목선을 타고 텐진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서 맺은 사제관계의 인연으로 경무국장인 김구의 경무국 소속 경호원이 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석주를 “친하게 믿는 지사요 제자라고 할 정도로 아끼고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교포를 위협하는 일본 첩자와 임시정부를 지키는 일이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꿈꾸던 나석주는 김창숙이 토지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폭파를 제의하자,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으로 위장하여 귀국하였다.
중국인으로 활동하며 기회를 엿보던 나석주는 19261228일 신문지로 권총을 감싸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맞은 편의 식산은행을 찾았다. 연말이라 많은 사람이 있어 정신이 없는 틈에 은행원 뒤쪽으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식산은행이 소란스럽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틈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간 나석주는 1층 수위실의 일본인을 사살했다. 그리고 2층 사무실로 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사살했다.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에 있던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하고는 옆 사무실의 기술과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온 나석주를 발견한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여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이면서 도주했다. 힘들다고 느낀 나석주는 전봇대에 기대어 “우리 2천만 민중아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라고 외치며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하며 순국했다.
사망 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매장했다.

나석주 열사(출처:힐링)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출처:힐링)
동양척식주식회사(출처:힐링)
나석주 열사의 편지(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