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일제의 식량수탈인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졌다.

윤의사 2021. 12. 27. 11:03

토지 조사 사업을 끝낸 일본은 한국을 부족한 일본의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는

산미 증식 계획을 펴나갔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일본은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업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쌀값이 갑자기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1933년까지 일본은 한반도에서 쌀의 생산보다 많은 식량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산미증식계획으로 많은 쌀을 수탈당한 곳은 주로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것이다.(사진출처:힐링)

쌀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군산 부잔교

대신 한민족에게는 만주에서 생산되는 보리나 콩 등의 잡곡을 수입하여 식량으로 대체하였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을 통해 군량미를 조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인천항의 약점인 조수간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중갑문을 만들게 되었다.

인천근대역사관의 모형 이중갑문

또한 이천과 여주의 쌀을 군량미로 인천항까지 이동시키기 위하여 협궤철도인 수인선과 수여선을 건설하였다.

수여선의 모습

일본의 끊임없는 수탈은 밥을 먹는 놋그릇과 수저, 요강 등 유기와

소나무의 송진까지 어린 아이들을 동원하여 수집하여 우리 민족을 헐벗게 만들었다.

이후 위안부와 강제 징병, 징용 등으로 더욱 가혹한 수탈을 이어갔다.

필자의 선친께서도 강제 징병으로 중국에서 훈련을 받으시고

내일 미얀마 전선으로 가야만 하셨는데,

일본의 항복으로 전선으로 가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들이 한밤중에 도망을 가서 귀국할 차비가 없어 3개월 동안 막노동을 하시고서야

11월에 인천항을 통해 귀국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