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3

오늘은 박수근 화가가 태어난 날

대한민국 서양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인 소재를 소박하고 서민적인 분위기로 잘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박수근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매일 산이나 들로 나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동 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유학이나 스승을 통하여 그림을 배웠다면,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니 천재라 하겠다. 그러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봄이 오다"가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1953년 대한민국 미술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다. 그 뒤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의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박수근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 공간감을 무시한 채 회백색을 주로..

오늘은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

1906년 1월31일자로 우리나라의 일본 공사관이 문을 닫고 통감부가 업무를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에 의한 통감 정치가 시작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11월에 강제로 맺으면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하면서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외교고문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는 국호만 존재할 뿐 실권은 일본이 행사한 것이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가 1910년 8월 29일의 한일합방으로 공식화되었지만, 이미 통감정치의 실시로 한반도는 일제에 의한 지배를 받게된 것이다. 2월에는 임시통감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3월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정식으로 부임하여 통감정치가 본격화되..

오늘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날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결과 조선과 후금(청)은 형제관계를 맺고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홍타시, 즉 태종은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아직도 명나라의 제후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자신이 직접 12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략하였다. 영리한 청 태종은 조선의 명장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였다. 또한 청나라 군이 오는 길목에 있는 포천의 반월산성이 있었지만, (사실 광해군 때 후금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반월산성을 다시 쌓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인조의 무관심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인조는 민회빈 강씨와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 등을 강..

오늘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타계

대한민국의 예술가이다.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특히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도쿄대학교에서 예술사와 음악사 등을 공부한 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가서 뮌헨대학교에서 음악사를 계속 공부했다. 1950년대 후반 쾰른의 엘렉트로니셰무지크슈투디오에서 일하던 중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 작곡가인 존 케이지를 만나 창조적인 작곡과 비정통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 비디오 예술에 눈떴다. 그 뒤 유럽과 미국을 떠돌면서, 실험성이 강한 전위적인 미술 집단인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백남준은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뒤로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오늘은 전화가 처음 설치

오늘날 사람들은 집안이건 밖이건 간에 걸어 다니며 전화를 할 수가 있다. 즉 휴대폰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므로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화는 1876년 미국인 벨에 의해 발명되어 통신 혁명을 가져왔다. 전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사용되던 모오스가 발명한 복잡한 기호로 이루어진 무선전신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1882년 상운이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1896년에 덕수궁에 전화를 설치한 것이 시작이었다. 1902년 3월 20일에는 통신 업무를 관장하던 한성전화소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나라에서 전화를 사용한 지 6년 만에 백성들도 전화를 쓸 수 있었다.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한성전화소는 전문 2조로 된 ‘전화권정규정’을..

오늘은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이 출생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활발한 외교 활동으로 일제 침략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1881년 1월 27일에 경남 동래(東萊,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에서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만호(晩湖), 서호(西湖) 등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에는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 외에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했을 때에는 김중문(金仲文)이라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참석 시에는 박경(Pak Kieng)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우사 김규식’으로 불렸으며 세례명은 요한(Johann)이었다. 젊은 시절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한 뒤 귀국하여 10여 년간을 경신학교..

오늘은 한성전기회사 설립

고종 35년(1898) 1월 26일 이근배, 김두승의 두 사람 명의로 ‘서울 시내의 전차와 전등, 그리고 전화의 시설 및 운영권’이 주어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황실이 비밀리에 일화 30만엔을 단독 출자하여 세운 기업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것은 고종 24년(1887) 3월 6일이다. 경복궁 내 건천궁에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습니다./아!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은 모두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라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향원정 연못가에 설치된 발전기는 16촉광 백열등 750개 켤 수 있는 동양 최대발전소이다.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탄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리니, 그 소리가 엄청 커서 ’마치 천둥이..

오늘은 카놋사의 굴욕으로 교황권 강화

동프랑크(독일)에서는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으며,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는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헝가리에 침입한 마쟈르인과 슬라브족을 격퇴하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를 정복하면서 교황권을 안정시켰다. 이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교황은 서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하면서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면서 로마 교황까지도 황제가 임명하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고 성직자도 황제가 정했다. 이때 바이킹이나 이슬람 등 외적의 침입이 많아 교회나 교황은 왕이나 영주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보호의 대가로 수도원의 수입과 성직자 임명권을 왕과 영주에게 주었다. 왕과 영주들은 성직자 임명권을 돈을 주고 사고팔았으며,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면서 교회의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교회의 세속화에 ..

오늘은 김좌진 장군이 순국

오늘은 김좌진 장군이 순국하신 날이다. 김좌진장군은 뛰어난 지략으로 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독립 전쟁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일제의 폭압에 억눌려 지내던 우리 겨레에게 용기를 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자는 명여, 호는 백야이다. 김좌진은 부유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 전쟁 놀이를 즐겨 했는데, 약한 편을 도와주기를 좋아했다. 열다섯 살 때에는 자기 집 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준 뒤 모두 풀어 주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육군 무관 학교에 들어갔고, 애국 지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국을 위해 일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호명 학교를 세..

오늘은 사수대첩의 대승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 결사대가 패배하자, 백제가 멸망하였다. 백제가 무너지자 당나라의 최고 실력자인 측천무후는 말했다. “황제의 아버지께서 못다한 뜻을 이제 우리가 이루리다. 자, 고구려를 공격하라!” 측천무후의 명령에 따라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나라는 660년 겨울에 백제를 무너뜨린 사기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소정방은 패수(오늘날의 대동강)를 따라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평양에는 큰 눈이 내려 소정방은 어려움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은 신라에 요구하였다. “우리 군사가 먹을 식량을 빨리 가져오시오.” 소정방의 요구에 신라는 위협을 느끼고 67세의 김유신이 직접 식량을 가지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한편 측천무후는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명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