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30일(음) 오늘의 역사,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날

윤의사 2022. 1. 30. 12:18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결과 조선과 후금(청)은 형제관계를 맺고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홍타시, 즉 태종은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아직도 명나라의 제후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자신이 직접 12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략하였다.

영리한 청 태종은 조선의 명장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였다.

또한 청나라 군이 오는 길목에 있는 포천의 반월산성이 있었지만,

(사실 광해군 때 후금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반월산성을 다시 쌓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인조의 무관심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인조는 민회빈 강씨와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곧이어 인조도 강화로 향하려 했으나, 청군이 마포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에 수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갔다.

남한산성에는 1만 3000여 명의 군사와 50여 일치의 식량이 있기에

40여 일을 청군과 대결했지만,  강화도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항복하였다.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와 소현세자가 1637년 1월 30일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 홍타시에게 삼삼배구고두례의 치욕적인 의식을 하며 항복했다.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항복 2년뒤인 1639년 청에서는 삼전도에 청태종의 송덕비를 강제로 세웠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 되었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싸움에서 명나라와 교섭한 사실을 알게된 청 조정이 최명길과 임경업을 선양으로 압송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간 지 8년만인 1645년에 최명길, 김상헌과 함께 귀국하였다.

포천 반월산성
삼전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