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25일 오늘의 역사, 카놋사의 굴욕으로 교황권 강화

윤의사 2022. 1. 25. 12:08

동프랑크(독일)에서는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으며,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는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헝가리에 침입한 마쟈르인과 슬라브족을 격퇴하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를 정복하면서 교황권을 안정시켰다. 이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교황은 서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하면서 962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면서 로마 교황까지도 황제가 임명하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고 성직자도 황제가 정했다.

이때 바이킹이나 이슬람 등 외적의 침입이 많아 교회나 교황은 왕이나 영주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보호의 대가로 수도원의 수입과 성직자 임명권을 왕과 영주에게 주었다. 왕과 영주들은 성직자 임명권을 돈을 주고 사고팔았으며,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면서 교회의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911년 클뤼니 수도원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토지 소유를 하지않으면서 국왕이나 제후의 통제에서 벗어나 수도원을 교황의 지배아래 두었다.

교황도 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교회개혁운동을 추진하면서 성직자의 결혼과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교황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자 성직자 임명권을 가졌던 국왕과 영주들이 반발하였다. 성직임명권을 교황에게 완전히 넘겨준다는 것은 군주로서의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10761, 보름스에서 국회를 소집하여 교황을 폐위시킨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이에 분개하였고, 같은 해 부활절 직전 그레고리우스 7세를 파문하였다. 교황의 명령에 대부분의 제후들은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10772월까지 국왕에 대한 파문 선고가 취소되지 않으면, 국왕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제후들의 움직임에 당황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제후들과의 신뢰 회복을 위하여 교황에게 탄원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폐하의 뜻을 잠시 거스른 점을 깊이 뉘우치면서 지난 1월에 냈던 교황 파면의 명령을 취소합니다. 그러하오니 교황께옵서 저에 대한 사면 결정을 내려주신다면 교황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교황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자, 1076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인리히 4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독일을 탈출하여 알프스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에 도착하여 교황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방문을 허락하는 대신 거친 털로 짠 수도의만 입고 모자와 양말도 없이 맨발로 꼬박 3일 산을 논 속에 서 있게 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황을 만날 날만 기다리며 용서를 청하니 3일 만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허락하였다. 이를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교황권의 절대적 우월성을 보여준 사건이면서, 중세를 신 중심의 사회로 이끌어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퇴보하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1122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칼릭스투스 2세 교황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보름스 협약이 맺어졌다. 이 협약으로 국왕은 성직자 임명권을 포기하는 대신 주교는 국왕의 봉신이 되기로 하였다.(민병덕의 <LTE세계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