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23

오늘은 성군 세종대왕이 승하

오늘은 우리글 훈민정음을 만든 것을 비롯해 정치, 경제, 군사,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께서 승하하신 날이다. 세종대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틀 위에서 조선은 안정된 유교 국가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스물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원래 맏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게 원칙이었지만, 태종은 셋째인 충녕 대군이 자질이 뛰어나 임금이 될 만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태종이 이루어놓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펴기 위해 힘썼고, 정치, 경제, 군사, 과학, 문화, 예술 등 그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모든 분야의 인재들을 받아들..

오늘은 윤동주시인 순국

윤동주는 시를 통해 일제의 노래로 살아가는 민족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희망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 조국의 아들로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갈망했던 그는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후쿠오카형무소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다.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간도나 만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아 민족의식이 강하고 독립 운동이 활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적인 끼를 마음껏 키우며 자랐고, 명동소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함께 이란 문예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뒤로 숭실중학교에 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광명학원 중학부로 옮겼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는 잡지 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여 눈길을 끌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월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 원소절, 상원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에선 오래 전부터 큰 명절로 여겼다. 옛날 사람들은 달이 밝으면 크게 기뻐하였다. 달은 음(陰)을 나타내, 여자를 상징한다. 여자는 곧 생산을 의미하므로, 큰 달을 보면서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던 것이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은 1년 중 첫 번째 보름달이 뜨고, 또 달이 매우 컸기에 한 해의 운을 점치는 날이었다. 정월 대보름날 보름달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그 해에 재수가 좋다고 했으며, 아들이 없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이 달을 먼저 보면 아들을 생산한다고 하여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달의 빛깔이나 모양에 따라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하였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고, 희면 장마가 크게 온다고 하였다. 달이 산 위로 떠오를 때..

오늘은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 입적

신라 경덕왕 때의 큰 스님으로 일찍이 바다를 건너 인도의 불교 성지를 돌아보고, 서역을 돌아본 뒤 을 지었다. 혜초는 어려서부터 당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그리고 723년부터 만 4년 동안 불교가 일어난 부다가야, 처음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녹야원, 석가모니가 태어난 쿠시나가라 등 많은 불교 유적지를 여행하고,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약 8년 동안 무려 2만 Km를 답사하였다. 그 뒤 장안으로 다시 돌아와 천복사에서 스승인 금강지와 함께 경전 을 연구하였다. 금강지가 죽은 후 중국 밀교의 계승자가 되어 밀교 경전의 번역에 힘썼다. 혜초는 나이가 들어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보냈는데, 이후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787년 2월 13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혜초는 입적 후..

오늘은 김홍집이 격살

조선 고종 때 정치가인 김홍집은 여러 차례 내각을 꾸리면서 갑오개혁 등의 정책을 실시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비교적 온건한 개화파였으나, 일본의 힘을 빌린 탓에 강한 반감을 불러 일으켜 결국 백성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자는 경능, 호는 도원, 시호는 충헌이다. 김홍집은 경주 김씨 집안으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서는 아들에게 “나라의 봉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정성을 다해 백성을 섬기라.”고 일렀고, 김홍집은 관직에 있으면서 평생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김홍집은 예조 참의 시절 제2차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일찌감치 문호를 개방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두루 살펴보고,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강대국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보와 자료를 ..

오늘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날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해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시해로 국내에서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군과 의병들의 대치 상황을 틈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세자와 함께 궁녀들이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일본군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아관’이란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의 준말이고, 파천은 임금이 궁궐을 떠나서 피한다는 뜻이다. 이완용과 이범진 등 친러파들은 혹시 모를 일본의 저항을 대비하여 인천항에 머물던 러시아군과 무기를 공사관으로 옮겼다. 아관파천으로 친러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 등 많은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에게 이권이 넘겨지자,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들은 조선에 대하여 금광 채..

오늘은 부석사 창건

의상이 당나라에서 공부하던 시절, 선묘라는 아가씨가 의상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러나 의상은 자신을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던 선묘를 두고 떠나 버렸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는 사랑하는 임이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한편 의상은 신라로 돌아온 뒤 화엄종을 알리기 위해 영주의 봉황산에 절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 채 절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하늘에서 의상을 지켜주던 선묘가 바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사람들을 겁주어 달아나게 하였다. 덕분에 의상은 무사히 절을 지을 수 있었다. 이 절이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이다. 선묘가 공중에 3번이나 띄웠다는 커다란 바위는 아직도 무량수전 서편에 있다. 부처의 가르침을 ..

오늘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타계

고려 인종 때의 유학자이자 정치가, 를 펴내 더 이상 중국이 아닌 우리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고, 고려의 역사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6명의 임금을 모시며 유학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자 힘썼고, 묘청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자는 입지, 호는 뇌천, 시호는 문열이다. 김부식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중국의 유교 경전들을 두루 읽으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부식은 벼슬에 나서 임금에게 직접 유학을 강의하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발달된 송나라 문물을 접해 견문을 크게 넓혔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이자겸이 신하의 도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김부식은 이자겸을 비판하여 잘못을 바로 잡았다. 한편 김부식..

오늘은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거둔 날

길을 가던 두 명의 관리는 깜짝 놀랐다. 별이 갑자기 어느 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별이 떨어진 집으로 관리들은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문을 두드렸다. “방금 이곳으로 별이 떨어졌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주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방금 아들을 낳았소이다.” “그 아이는 분명 나라에 중요한 일을 할 인물이니 잘 키워 주십시오.” 관리들은 말을 마치고 주인에게 큰 절을 하였다. 바로 이 아이가 강감찬이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그 곳을 ‘낙성대’라고 불렀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이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이다. 강감찬은 키가 아주 작고, 마마(천연두)라는 병을 앓아 살짝 곰보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가 뛰어나 언제나 동네 아이들을 이끌며 놀..

오늘은 호치민이 베트남 공산당 창설

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 세계에는 민족자결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이근 영웅이 나타났다. 바로 호치민으로 알려진 응우엔 아이 꾸옥이었다. 그는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을 처음부터 이끌어온 사람으로 1890년 응에 안 지방의 가난한 향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럽에 가서 공부할 생각으로 스물 한 살 때 프랑스 상선의 요리사 보조원으로 근무하여 프랑스로 갔다. 레닌이 쓴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각국 대표들에게 ‘베트남의 자립과 언론․결사․종교의 자유 등 8개 요구 사항을 보낸 것이 프랑스에 대한 첫 번째 저항운동이었다. 중국의 광둥으로 온 호치민은 1925년 6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