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2월 16일 오늘의 역사, 윤동주 시인 순국

윤의사 2022. 2. 16. 18:41

윤동주는 시를 통해 일제의 노래로 살아가는 민족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희망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 

조국의 아들로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갈망했던 그는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후쿠오카형무소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다.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간도나 만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아 민족의식이 강하고 독립 운동이 활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적인 끼를 마음껏 키우며 자랐고, 

명동소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문예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뒤로 숭실중학교에 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광명학원 중학부로 옮겼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는 잡지 <가톨릭 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여 눈길을 끌었다.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민족의식이 강한 교수들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졸업 뒤에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릿교대학에 들어갔다가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려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무렵 일본은 교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을 만들어 유학생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는데, 

윤동주도 이 사건에 얽혔던 것이다. 

윤동주는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고, 광복을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뼈만 앙상했는데, 

날마다 강제로 주사를 맞으며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갔던 것이다.

 

윤동주가 죽은 이듬해 <경향신문> 쉽게 쓰여진 시가 실렸고,

1948년에는 유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사실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 윤동주는 그동안 써둔 시를 모아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이 시집을 동생과 친구들이 그의 다른 시들을 덧붙여 펴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윤동주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고, 일제에 저항한 시인으로 큰 각광을 받았다.

서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이처럼 절망을 딛고 일어나 현실을 뚫고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준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가장 사랑받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가 다닌 연세대학교와 일본 도지샤대학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2월 추위답지않게 매섭습니다.

코시국에 건강 조심하시며

다가오는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윤동주시인의 '봄'을 적습니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구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창의문 남쪽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 문학관 내의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윤동주문학관 뒷편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의 서시 비석
정선의 '장안연우',&nbsp;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 백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서울 장안을 내려다 본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의 '장안연우'처럼, 필자는 가을 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 사진으로...